소신을 따른 용기 –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과 싱글러브 장군

윤상용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
지난 1월 말인 2022년 1월 29일, 테네시 주의 프랭클린(Franklin)에서 한 노병이 백 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한 세기를 풍미한 그의 이름은 존 커크 싱글러브(John Kirk Singlaub, 1921~2022).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월에 처음 군문을 밟은 그는 유럽대륙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싸웠고, 1944년에는 영국의 특수작전집행국(SOE: Special Operations Executive)과 미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자유프랑스 중앙정보작전국이 공동으로 실시한 ‘제드버러(Jedburgh)’ 작전에 투입되어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후방에 침투했던 세 명의 요원 중 한 명이었다. 이 당시 그의 상관이던 윌리엄 케이시(William J. Casey, 1913~1987/CIA 국장 역임)는 싱글러브에게 만약을 위해 청산가리 알약을 주었는데, 그는 이를 받지 않으면서 “됐습니다. 전 적에게 잡힐 계획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싱글러브는 독일 항복 후 태평양 전선으로 이동했으며, 중국 하이난(海南) 섬으로 침투해 연합군 포로를 탈출시키는 등 전설에 가까운 활약을 펼쳤다. 전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최초에는 CIA 부 거점장으로 왔다가 직접 대대장으로 보직을 바꿔 참전한 뒤 은성훈장까지 받았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OSS가 중앙정보국(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으로 개편하자 그는 만주, 베트남, 라오스, 니카라과,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누비고 다니며 자유세계의 승리와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기위해 혼신을 다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앞서 언급한 혁혁한 빛나는 전공보다는 그의 군생활 막바지에 소신을 갖고 일어섰던 단 하나의 행동으로 오래도록 기억됐다. 그가 주한미군사령부(USFK: United States Forces-Korea) 참모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카터 행정부가 선거공약으로 걸었던 주한미군 철군을 강행하려 하자 싱글러브 장군은 자신의 양심과 군 경력을 모두 걸고 카터의 정책에 맞섰다. 심지어 카터는 그를 두 번이나 회유했지만 그는 미국 최고의 권력자와 타협하는 대신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시 그는 어째서 평생의 업을 거는 것으로 모자라 군인의 덕목인 ‘상관에 대한 복종’까지 거부했던 것일까?
싱글러브 장군이 항명을 한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인 지미 카터(James Earl Carter, 1924~)는 1960년대 중반에 혜성처럼 정계에 등장했다. 해군 대위로 예편한 그는 부친으로부터 땅콩농장을 상속받아 잠시 경영했으며, 1950년대 중후반부터 인종차별 문제가 대두되자 차별철폐 민권운동에 목소리를 내면서 정계로 나가 1963년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1964년 재선에 성공한 카터는 1966년 조지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고, 그 해 선거에서는 한 차례 고배를 마셨으나 다음 선거인 1971년에는 주지사에 당선됐다. 하지만 당선 전까지 인종문제에 백인입장을 대변하던 그는 승리하자마자 다시 종전의 인종차별 철폐 입장으로 선회했다. 이 때문에 지지율이 급감했으므로 사실상 그의 재선 가능성은 희박해 졌고, 이에 그는 아예 대선 판으로 나가기로 결심한 뒤 1976년, 베트남 전쟁 패전을 겪은 데다 세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악화와 인플레이션으로 인기가 급락한 공화당의 제럴드 포드(Gerald R. Ford, 1913~2006) 대통령을 상대로 민주당 대선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대선 후보 당시 카터는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베트남 전쟁의 피로 누적, 경제 악화로 지지율이 폭락한 공화당의 약점을 집중 공략했다. 그는 미국 여론이 전쟁에 진저리가 난 상태였으므로 대선 후보시절부터 공약으로 전투병력 15,000명, 총 병력 약 4만 명 수준이던 주한미군의 철군을 천명했다. 당시 미국 여론은 베트남 전쟁이 10년 가까이 가면서 엄청난 전사자만 양산한데다 결과마저 사실상의 패배로 난 것에 질려 있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한국에서 또 한 번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 때문에 미국이 다시 베트남 전쟁 같은 수렁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이에 카터 행정부는 박정희 행정부의 인권 문제를 주한미군 철군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필 바로 이 시기인 1976년 10월 25일에 박동선 사건, 일명 “코리아 게이트”가 터져 한국에 대한 미국 여론이 악화됐고, 당시 한국의 경제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타고 있었으므로 “미국이 비용을 모두 부담하면서 한국에 6만 명씩 병력을 주둔”시켜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에 미국민들이 반감을 가졌다. 전반적인 주변 정세도 주한미군 문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1973년~1974년에 발생한 제 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의 여파로 급등했던 유가 문제는 아직 제대로 잡히지 않고 있었고, 앞선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국에 방문한 이래 미-중간 데탕트(détente: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던 점도 주한미군 철군론을 부채질했다.
1977년 1월에 임기를 시작한 카터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대한민국에서 공군력과 군수지원부대를 제외한 지상군과 약 700기에 달하는 핵무기의 철수를 밀어붙였다. 카터는 주한미군 철군을 추진하면서 한국정부와는 아무런 협의를 하지 않았으나, 일본에는 월터 먼데일(Walter F. Mondale, 1928~2021) 부통령을 파견해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1905~1995) 총리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철군에 따른 일본 방위태세 영향에 관해 논의했다. 카터 행정부는 1977년 2월이 되어서야 한국정부에 관련사실을 통보했으며, 한국정부에는 아무런 협의 없이 철군 추진을 통보했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이 동맹국을 버리려 하고 있고, 베트남 전쟁 기간 중 대한민국이 베트남 공화국 진영에서 두 번째로 많은 전력을 파병한데다 16,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던 ‘혈맹’임을 강조하면서 국내외에 철군 반대 여론을 조성하려 했다.
다행스럽게도 카터의 일방적인 철군 시도는 한국 정부뿐 아니라 미국 정부 내에서도 반대의견이 일었다. 미 중앙정보국(CIA)을 비롯한 정보공동체가 철군 계획에 우려를 표명했고, 미 의회 내의 상원 및 하원 외교 및 군사위원회도 철군안에 제동을 걸었다. 카터가 아직 대선 후보자였던 1976년, 미 중앙정보국을 이끌던 조지 부시(George W. H. Bush, 1924~2018/미국 제 41대 대통령) 국장은 당시 남북한 간 긴장 수위가 높으므로 미군을 한국에서 철군시킬 시점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미 1968년에 발생한 푸에블로(USS Pueblo, AGER-2) 함 피랍사건 및 1974년 1호 땅굴 발견,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일련의 도발 징후가 있었고, 결정적으로는 1974년 4월, CIA가 북한의 김일성이 한국에 선제공격을 취하려는 것을 중공이 저지했던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에 조지 부시 국장은 카터 후보가 해사를 졸업한 해군장교 출신이고, 자기 자신의 대선 공약이기도 한 주한미군 문제를 잘 설명하면 이해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은 반대였다. 카터는 부시의 조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정보기관을 불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CIA는 전략을 바꿔 기갑자산을 비롯한 북한의 전력이 계속 증강되고 있다는 보고를 계속 올렸고, 남북간 전력 교환비율이 1:2에 달한다는 비밀 문건을 일부러 유출했다. 그럼에도 카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취임 바로 직후인 1977년 1월 26일에는 리처드 홀브룩(Richard C. Holbrooke, 1941~2010/주 UN 미국대사를 역임)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문제 차관보에게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바로 몇일 뒤 카터는 사이러스 밴스(Cyrus R. Vance, Jr. 1954~) 국무장관을 통해 “철군하느냐 마느냐 보다는 어떻게 철군해야 할지’에 집중하라고 다시 지시했다.
한편 군에서도 강력한 반대의견이 등장했다. 이때 카터의 결정에 정면으로 반발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당시 주한미군사령부의 참모장이었던 존 싱글러브 장군이었다. 군인이지만 오랜 세월 정보계통에 있으면서 세계 정세에도 정통했던 싱글러브 장군은 카터가 막 주한미군 철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한 1977년 3월부터 행정부의 정책을 정면에서 강력하게 비난했다. 카터 행정부는 대선 공약이기도 했던 주한미군 철군이 시작부터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게 된 데다 바로 철군을 지휘해야 할 주한미군사의 지휘부 장성이 항명을 해오자 강경하게 대응했다. 바로 며칠 뒤인 3월 21일자로 존 싱글러브 장군을 보직 해임시킨 것이다. 카터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갈 수 있던 것은 아직 정권 초기인데다 바로 3월 둘째 주에 실시된 대통령 국정지지율 조사에서 대통령 지지 여론이 71%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싱글러브 장군 해임 결정이 내려진 뒤인 3월 29일에 실시된 조사에서 국정지지율은 67%로 내려 앉았고, 그의 지지율은 이후 임기가 끝날 때까지 두 번 다시 70%대로 회복되지 못했다. 결국 주한미군뿐 아니라 싱글러브 장군의 처우 문제로 씨름을 하던 카터는 일단 무마책으로 5월 27일, 싱글러브 장군을 당시 미 육군 최대규모 사령부였던 미 육군 전력사령부(US Forces Command; FORCECOM/911 테러 이후 북부사령부에 흡수) 참모장으로 다시 보직했다고 발표하면서 군과 대립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미국의 여론은 카터 취임으로부터 불과 몇 달 사이에 이 사건을 기점으로 크게 변했다. 미국의 주요 방송사인 CBS와 뉴욕타임즈는 1977년 7월, 공동으로 “한국에서의 미 지상군 유지” 문제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주한미군이 그대로 존속해야 한다는 응답이 52%, 철수해야 한다는 여론은 34%에 불과했다. 심지어 1년 뒤인 1978년, 컨설팅 업체인 포토맥 어소시에이트(Potomac Associate)에서 동일 주제로 다시 여론조사를 실시한 바에 따르면 찬성이 55%로 증가했으며, 찬성 응답자는 주한미군의 규모가 현상 유지 혹은 증강되는 것에 대해서도 찬성했다. 카터 당선 전만 해도 미국의 여론은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기 때문에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군사적 충돌에 미국이 말려들어갈지 모른다고 우려했으나, 1978년 포토맥 어소시에이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오히려 주한미군의 존속이 또 다른 한국전쟁의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응답이 다수였다던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봉합되지 않았고, 싱글러브 장군도 간단하게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반드시 전력 비대칭화의 틈을 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 것으로 보았다. 싱글러브 장군은 1978년 4월, 조지아 공과대학교(Georgia Tech)의 ROTC 후보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던 중 다시 한 번 카터의 국방정책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중성자탄 개발을 중단하기로 한 카터의 정책을 두고 “터무니없고 군사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말했으며, 파나마 운하를 포기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도 강도높게 비판했을 뿐 아니라 주한미군 철군 문제도 결국 북한의 침공만 야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싱글러브는 더 나아가 5월 19일자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때 보수성향인 워싱턴포스트의 대척점에 선 미국 내 최대 진보언론사인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는 싱글러브 장군의 오랜 군, 정보계통 경력을 부각하면서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즉, 보수-진보의 양대 언론사가 모두 싱글러브 장군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카터 행정부를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미 육군은 대통령을 면전에서 비판하며 항명한 싱글러브 소장의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그를 펜타곤으로 소환했다. 미 육군은 이튿날 싱글러브 장군이 자진 전역을 받아들였다고 발표했으며, 1978년 6월 1일자로 전역했다.
카터 행정부는 싱글러브 장군의 항명사태를 정점으로 주한미군 철군의 탄력을 상실했다. 심지어 이 시기부터 냉전이 더욱 심화되기 시작했으므로 1978년 중순부터는 미 여론과 언론, 의회, 군이 모두 다 철군을 반대했다. 민주당의 로버트 베어드(Robert C. Byrd, 1917~2010/상원/웨스트 버지니아), 게리 하트(Gary W. Hart, 1936~/상원/콜로라도), 새뮤얼 넌(Samuel A. Nunn, Jr., 1938~/상원/조지아), 공화당의 윌리엄 코언(William S. Cohen, 1940~/하원/메인), 존 타워(John G. Tower, 1925~1991/상원/텍사스) 의원 등이 주한미군 철수 보류를 요구했으며, 카터 행정부는 철군에서 감군으로 목표를 바꿨다. 카터는 결국 1979년 1월 20일자로 대통령검토각서(PRM: Presidential Review Memorandum) 45호를 통해 철군 재검토 요구를 받아들인 뒤 검토가 완료될 때까지 철군을 중지하도록 지시해 자연히 ‘주한미군 철군’ 문제도 흐지부지됐다. 그러던 중 같은 해 말인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동서간 해빙 무드마저 깨지게 되자 철군 문제는 완전히 기세를 잃었으며, 결국 이듬해 대선에서 카터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후보에게 패하면서 철군 문제는 영영 종지부를 찍었다.
싱글러브 장군은 주한미군 철군 문제를 언급한 뒤로 카터 행정부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당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밝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못박았다. 그는 전역 후 이 사건으로 별 둘로 예편하게 된 것에 대해 후회가 없냐는 질문을 받자 “내 별 몇 개와 한국인 수백만 명의 목숨을 바꾼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라고 답했다. 그의 노력으로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잔류하게 된 뒤에도 한-미관계의 영향에 따라 철군설이나 감군설이 몇 차례 언급됐지만,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한미동맹은 69년째 건재하며 한-미 연합방어체계도 언제나처럼 굳건할 뿐이다. 그 뒤에는 싱글러브 장군처럼 사심없는 자세로 최선을 다해 두 나라의 혈맹관계를 지켜온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 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소신을 따른 용기 –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과 싱글러브 장군
윤상용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
지난 1월 말인 2022년 1월 29일, 테네시 주의 프랭클린(Franklin)에서 한 노병이 백 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한 세기를 풍미한 그의 이름은 존 커크 싱글러브(John Kirk Singlaub, 1921~2022).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월에 처음 군문을 밟은 그는 유럽대륙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싸웠고, 1944년에는 영국의 특수작전집행국(SOE: Special Operations Executive)과 미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자유프랑스 중앙정보작전국이 공동으로 실시한 ‘제드버러(Jedburgh)’ 작전에 투입되어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후방에 침투했던 세 명의 요원 중 한 명이었다. 이 당시 그의 상관이던 윌리엄 케이시(William J. Casey, 1913~1987/CIA 국장 역임)는 싱글러브에게 만약을 위해 청산가리 알약을 주었는데, 그는 이를 받지 않으면서 “됐습니다. 전 적에게 잡힐 계획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싱글러브는 독일 항복 후 태평양 전선으로 이동했으며, 중국 하이난(海南) 섬으로 침투해 연합군 포로를 탈출시키는 등 전설에 가까운 활약을 펼쳤다. 전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최초에는 CIA 부 거점장으로 왔다가 직접 대대장으로 보직을 바꿔 참전한 뒤 은성훈장까지 받았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OSS가 중앙정보국(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으로 개편하자 그는 만주, 베트남, 라오스, 니카라과,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누비고 다니며 자유세계의 승리와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기위해 혼신을 다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앞서 언급한 혁혁한 빛나는 전공보다는 그의 군생활 막바지에 소신을 갖고 일어섰던 단 하나의 행동으로 오래도록 기억됐다. 그가 주한미군사령부(USFK: United States Forces-Korea) 참모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카터 행정부가 선거공약으로 걸었던 주한미군 철군을 강행하려 하자 싱글러브 장군은 자신의 양심과 군 경력을 모두 걸고 카터의 정책에 맞섰다. 심지어 카터는 그를 두 번이나 회유했지만 그는 미국 최고의 권력자와 타협하는 대신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시 그는 어째서 평생의 업을 거는 것으로 모자라 군인의 덕목인 ‘상관에 대한 복종’까지 거부했던 것일까?
싱글러브 장군이 항명을 한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인 지미 카터(James Earl Carter, 1924~)는 1960년대 중반에 혜성처럼 정계에 등장했다. 해군 대위로 예편한 그는 부친으로부터 땅콩농장을 상속받아 잠시 경영했으며, 1950년대 중후반부터 인종차별 문제가 대두되자 차별철폐 민권운동에 목소리를 내면서 정계로 나가 1963년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1964년 재선에 성공한 카터는 1966년 조지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고, 그 해 선거에서는 한 차례 고배를 마셨으나 다음 선거인 1971년에는 주지사에 당선됐다. 하지만 당선 전까지 인종문제에 백인입장을 대변하던 그는 승리하자마자 다시 종전의 인종차별 철폐 입장으로 선회했다. 이 때문에 지지율이 급감했으므로 사실상 그의 재선 가능성은 희박해 졌고, 이에 그는 아예 대선 판으로 나가기로 결심한 뒤 1976년, 베트남 전쟁 패전을 겪은 데다 세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악화와 인플레이션으로 인기가 급락한 공화당의 제럴드 포드(Gerald R. Ford, 1913~2006) 대통령을 상대로 민주당 대선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대선 후보 당시 카터는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베트남 전쟁의 피로 누적, 경제 악화로 지지율이 폭락한 공화당의 약점을 집중 공략했다. 그는 미국 여론이 전쟁에 진저리가 난 상태였으므로 대선 후보시절부터 공약으로 전투병력 15,000명, 총 병력 약 4만 명 수준이던 주한미군의 철군을 천명했다. 당시 미국 여론은 베트남 전쟁이 10년 가까이 가면서 엄청난 전사자만 양산한데다 결과마저 사실상의 패배로 난 것에 질려 있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한국에서 또 한 번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 때문에 미국이 다시 베트남 전쟁 같은 수렁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이에 카터 행정부는 박정희 행정부의 인권 문제를 주한미군 철군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필 바로 이 시기인 1976년 10월 25일에 박동선 사건, 일명 “코리아 게이트”가 터져 한국에 대한 미국 여론이 악화됐고, 당시 한국의 경제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타고 있었으므로 “미국이 비용을 모두 부담하면서 한국에 6만 명씩 병력을 주둔”시켜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에 미국민들이 반감을 가졌다. 전반적인 주변 정세도 주한미군 문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1973년~1974년에 발생한 제 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의 여파로 급등했던 유가 문제는 아직 제대로 잡히지 않고 있었고, 앞선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국에 방문한 이래 미-중간 데탕트(détente: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던 점도 주한미군 철군론을 부채질했다.
1977년 1월에 임기를 시작한 카터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대한민국에서 공군력과 군수지원부대를 제외한 지상군과 약 700기에 달하는 핵무기의 철수를 밀어붙였다. 카터는 주한미군 철군을 추진하면서 한국정부와는 아무런 협의를 하지 않았으나, 일본에는 월터 먼데일(Walter F. Mondale, 1928~2021) 부통령을 파견해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1905~1995) 총리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철군에 따른 일본 방위태세 영향에 관해 논의했다. 카터 행정부는 1977년 2월이 되어서야 한국정부에 관련사실을 통보했으며, 한국정부에는 아무런 협의 없이 철군 추진을 통보했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이 동맹국을 버리려 하고 있고, 베트남 전쟁 기간 중 대한민국이 베트남 공화국 진영에서 두 번째로 많은 전력을 파병한데다 16,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던 ‘혈맹’임을 강조하면서 국내외에 철군 반대 여론을 조성하려 했다.
다행스럽게도 카터의 일방적인 철군 시도는 한국 정부뿐 아니라 미국 정부 내에서도 반대의견이 일었다. 미 중앙정보국(CIA)을 비롯한 정보공동체가 철군 계획에 우려를 표명했고, 미 의회 내의 상원 및 하원 외교 및 군사위원회도 철군안에 제동을 걸었다. 카터가 아직 대선 후보자였던 1976년, 미 중앙정보국을 이끌던 조지 부시(George W. H. Bush, 1924~2018/미국 제 41대 대통령) 국장은 당시 남북한 간 긴장 수위가 높으므로 미군을 한국에서 철군시킬 시점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미 1968년에 발생한 푸에블로(USS Pueblo, AGER-2) 함 피랍사건 및 1974년 1호 땅굴 발견,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일련의 도발 징후가 있었고, 결정적으로는 1974년 4월, CIA가 북한의 김일성이 한국에 선제공격을 취하려는 것을 중공이 저지했던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에 조지 부시 국장은 카터 후보가 해사를 졸업한 해군장교 출신이고, 자기 자신의 대선 공약이기도 한 주한미군 문제를 잘 설명하면 이해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은 반대였다. 카터는 부시의 조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정보기관을 불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CIA는 전략을 바꿔 기갑자산을 비롯한 북한의 전력이 계속 증강되고 있다는 보고를 계속 올렸고, 남북간 전력 교환비율이 1:2에 달한다는 비밀 문건을 일부러 유출했다. 그럼에도 카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취임 바로 직후인 1977년 1월 26일에는 리처드 홀브룩(Richard C. Holbrooke, 1941~2010/주 UN 미국대사를 역임)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문제 차관보에게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바로 몇일 뒤 카터는 사이러스 밴스(Cyrus R. Vance, Jr. 1954~) 국무장관을 통해 “철군하느냐 마느냐 보다는 어떻게 철군해야 할지’에 집중하라고 다시 지시했다.
한편 군에서도 강력한 반대의견이 등장했다. 이때 카터의 결정에 정면으로 반발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당시 주한미군사령부의 참모장이었던 존 싱글러브 장군이었다. 군인이지만 오랜 세월 정보계통에 있으면서 세계 정세에도 정통했던 싱글러브 장군은 카터가 막 주한미군 철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한 1977년 3월부터 행정부의 정책을 정면에서 강력하게 비난했다. 카터 행정부는 대선 공약이기도 했던 주한미군 철군이 시작부터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게 된 데다 바로 철군을 지휘해야 할 주한미군사의 지휘부 장성이 항명을 해오자 강경하게 대응했다. 바로 며칠 뒤인 3월 21일자로 존 싱글러브 장군을 보직 해임시킨 것이다. 카터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갈 수 있던 것은 아직 정권 초기인데다 바로 3월 둘째 주에 실시된 대통령 국정지지율 조사에서 대통령 지지 여론이 71%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싱글러브 장군 해임 결정이 내려진 뒤인 3월 29일에 실시된 조사에서 국정지지율은 67%로 내려 앉았고, 그의 지지율은 이후 임기가 끝날 때까지 두 번 다시 70%대로 회복되지 못했다. 결국 주한미군뿐 아니라 싱글러브 장군의 처우 문제로 씨름을 하던 카터는 일단 무마책으로 5월 27일, 싱글러브 장군을 당시 미 육군 최대규모 사령부였던 미 육군 전력사령부(US Forces Command; FORCECOM/911 테러 이후 북부사령부에 흡수) 참모장으로 다시 보직했다고 발표하면서 군과 대립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미국의 여론은 카터 취임으로부터 불과 몇 달 사이에 이 사건을 기점으로 크게 변했다. 미국의 주요 방송사인 CBS와 뉴욕타임즈는 1977년 7월, 공동으로 “한국에서의 미 지상군 유지” 문제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주한미군이 그대로 존속해야 한다는 응답이 52%, 철수해야 한다는 여론은 34%에 불과했다. 심지어 1년 뒤인 1978년, 컨설팅 업체인 포토맥 어소시에이트(Potomac Associate)에서 동일 주제로 다시 여론조사를 실시한 바에 따르면 찬성이 55%로 증가했으며, 찬성 응답자는 주한미군의 규모가 현상 유지 혹은 증강되는 것에 대해서도 찬성했다. 카터 당선 전만 해도 미국의 여론은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기 때문에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군사적 충돌에 미국이 말려들어갈지 모른다고 우려했으나, 1978년 포토맥 어소시에이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오히려 주한미군의 존속이 또 다른 한국전쟁의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응답이 다수였다던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봉합되지 않았고, 싱글러브 장군도 간단하게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반드시 전력 비대칭화의 틈을 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 것으로 보았다. 싱글러브 장군은 1978년 4월, 조지아 공과대학교(Georgia Tech)의 ROTC 후보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던 중 다시 한 번 카터의 국방정책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중성자탄 개발을 중단하기로 한 카터의 정책을 두고 “터무니없고 군사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말했으며, 파나마 운하를 포기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도 강도높게 비판했을 뿐 아니라 주한미군 철군 문제도 결국 북한의 침공만 야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싱글러브는 더 나아가 5월 19일자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때 보수성향인 워싱턴포스트의 대척점에 선 미국 내 최대 진보언론사인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는 싱글러브 장군의 오랜 군, 정보계통 경력을 부각하면서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즉, 보수-진보의 양대 언론사가 모두 싱글러브 장군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카터 행정부를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미 육군은 대통령을 면전에서 비판하며 항명한 싱글러브 소장의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그를 펜타곤으로 소환했다. 미 육군은 이튿날 싱글러브 장군이 자진 전역을 받아들였다고 발표했으며, 1978년 6월 1일자로 전역했다.
카터 행정부는 싱글러브 장군의 항명사태를 정점으로 주한미군 철군의 탄력을 상실했다. 심지어 이 시기부터 냉전이 더욱 심화되기 시작했으므로 1978년 중순부터는 미 여론과 언론, 의회, 군이 모두 다 철군을 반대했다. 민주당의 로버트 베어드(Robert C. Byrd, 1917~2010/상원/웨스트 버지니아), 게리 하트(Gary W. Hart, 1936~/상원/콜로라도), 새뮤얼 넌(Samuel A. Nunn, Jr., 1938~/상원/조지아), 공화당의 윌리엄 코언(William S. Cohen, 1940~/하원/메인), 존 타워(John G. Tower, 1925~1991/상원/텍사스) 의원 등이 주한미군 철수 보류를 요구했으며, 카터 행정부는 철군에서 감군으로 목표를 바꿨다. 카터는 결국 1979년 1월 20일자로 대통령검토각서(PRM: Presidential Review Memorandum) 45호를 통해 철군 재검토 요구를 받아들인 뒤 검토가 완료될 때까지 철군을 중지하도록 지시해 자연히 ‘주한미군 철군’ 문제도 흐지부지됐다. 그러던 중 같은 해 말인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동서간 해빙 무드마저 깨지게 되자 철군 문제는 완전히 기세를 잃었으며, 결국 이듬해 대선에서 카터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후보에게 패하면서 철군 문제는 영영 종지부를 찍었다.
싱글러브 장군은 주한미군 철군 문제를 언급한 뒤로 카터 행정부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당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밝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못박았다. 그는 전역 후 이 사건으로 별 둘로 예편하게 된 것에 대해 후회가 없냐는 질문을 받자 “내 별 몇 개와 한국인 수백만 명의 목숨을 바꾼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라고 답했다. 그의 노력으로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잔류하게 된 뒤에도 한-미관계의 영향에 따라 철군설이나 감군설이 몇 차례 언급됐지만,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한미동맹은 69년째 건재하며 한-미 연합방어체계도 언제나처럼 굳건할 뿐이다. 그 뒤에는 싱글러브 장군처럼 사심없는 자세로 최선을 다해 두 나라의 혈맹관계를 지켜온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 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