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정전 70주년: 역사와 과제
김명섭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 서론
2023년은 한반도가 정전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70주년의 의미도 크지만, 1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이 한반도 정전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불완전하나마 지금 한반도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죽어가고 있는 많은 이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한반도 정전체제의 의미는 한반도에서 조차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들로 전후의 폐허와 가난, 그리고 풍요 속의 무관심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들조차 정전체제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주고 있지 않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의 실상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이유들 중에는 정전협상 당시 마지막 한국군 대표였고, 정전협정 조인식장에 배석했던 최덕신이 훗날 대한민국 외무장관까지 역임하고 월북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정전협상 당시 통역장교로 활약했던 이수영 대사는 프랑스 대사로 재임 중 대사관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정전 당시의 상황을 후대에게 좀 더 자세히 전해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 글은 한반도 정전의 역사와 관련해서 자주 논란이 되는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정전 70주년이 대한민국 국민 각자에게 부과하고 있는 과제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2. 한반도 정전(armistice)의 역사
1) 휴전, 정전, 정화의 차이
휴전선이라는 용어에서 보여지듯이 정전과 함께 휴전이라는 용어도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렇다면 휴전과 정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두 용어는 번역 상의 문제일 뿐 의미는 같다.
6·25전쟁 이전부터 라틴어의 arma(무기)와 stitium(정지)에서 유래되어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공통적으로 armistice라고 사용되는 용어가 일본과 한국에서 이미 ‘休戰(휴전)’이라고 번역, 소개되고 있었다. 제1차 헤이그평화회의(1899)에서 채택된 ‘육전의 법 및 관습에 관한 협약’과 그 부속서 ‘육전법 및 관습에 관한 규칙’이 일본과 대한 제국에 번역 소개될 때, armistice라는 용어는 휴전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1953년 7월 27일 성립된 armistice를 휴전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번역어를 사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협정문의 한글본과 중국어본에는 모두 정전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영어본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원문에 근거해서 정전협정이라고 쓰고 있다.
정화와 정전의 차이는 무엇일까? 정전협정문의 제2조의 소제목은 “정화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로서 정화(停火, 영문본에서는 cease-fire)와 정전(停戰, 영문본에서는 armistice)이 명확히 구별되고 있다. 정화(cease-fire)는 “잠정적 군사정전(interim military armistice)의 일부”이며, “군사정전은 정화를 포함하나 정치적, 영토적 문제를 포함하지 않고 엄격한 군사적 문제들로 제한된다”(limited strictly to military questions and would not involve any political or territorial matter). 1953년 7월 27일에 발효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정전은 정화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제반 조치들에 관한 군사적 합의를 포함한다.
[자료] 정전협정 영문본 서명 부분. (출처: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2) 정전협정에 이승만 대통령의 서명이 없는 이유
정전협정 서명란에 김일성 이름은 있고, 이승만 이름은 없다는 단순 대비를 통해 한국(군)이 정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라고 주장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정전협정은 평화조약과 달리 국가원수들이 서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장의 군사령관들이 서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이다. 때로는 이승만 대통령을 폄하하거나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훼손하기 위한 목적에서 유포되기도 한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5시 15분 프랑스 북부 콩피에뉴(Compiègne)에서 체결되고 오전 11시부터 발효된 제1차 세계대전 정전협정문도 각국 국가원수들이 서명하지 않았다. 연합군 측에서는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 프랑스) 원수와 그를 보좌했던 로슬린 웨미스(Rosslyn E. Wemyss, 영국) 제독이 서명했을 뿐이다.
6·25 전쟁 정전협정의 경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직함 아래 김일성의 서명,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라는 직함 아래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의 서명, 그리고 “국제련합군총사령관”이라는 직함 아래 마크 클라크(Mark Clark)의 서명이 있다. 이들은 모두 군사령관의 자격으로(ex officio) 서명했다. 군사령관들이 서명하는 정전협정문에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 정부 주석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이나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서명하지 않았듯이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서명할 이유는 없었다.
간혹 김일성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직함과 더불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라는 직함을 병기했음에 주목하여 김일성은 최고사령관인 동시에 국가원수로서 서명했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원수”란 영문본의 서명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군사적 계급으로서의 원수(元帥, Marshal)를 의미하는 것이지 국가수반으로서의 원수(元首, head of stat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크 클라크가 한국문 위에 “미국 륙군 대장”이라는 직함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라는 직함과 병기하고 서명한 것과 같다.중국공산당 파병부대를 이끌었던 펑더화이의 경우는 계급 없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라는 직함만을 명기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서명하지 않았더라도 한국군 총사령관이라도 서명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군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협정의 서명자들만이 당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정전협정 체결 당시에도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사령관 퍼싱(John Pershing)은 독일군의 무조건항복을 받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했고, 서명하지 않았다. 퍼싱의 서명이 없다고 해서 미군이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주장은 제기된 바가 없고, 미군은 미군 사령관이 서명하지 않은 정전협정에 기속(羈束)되었다. 6·25전쟁 정전협정문의 국제연합군 사령관 서명 역시당시 그의 통솔하에 있던 16개국 참전군 사령관들과 한국군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가 ‘통일 없는 정전’에 반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협정문에 대한 호오(好惡)가 협정의 당사자성을 부정할 수는 없고, 기속성(羈屬性)의 조각사유(阻却事由)가 될 수도 없다. 따라서 한국군이 국제연합군 사령관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환수하게 되더라도 정전협정에 대한 기속성은 계속 유지된다.
3) 정전을 유지한 것은 정전협정 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6·25전쟁 참전 16개국들 중 미국은 연인원 1,789,000명을 파병하여 가장 적은 인원을 파병한 룩셈부르크에 비해 무려 17,890배의 인원을 파병했다. 미국 의회의 비준을 받지 않고, 국제연합 헌장과 국제연합의 한반도 관련 결의들을 준수하여 침공 저지 및 평화 회복 활동에 나서는 형식으로 일본점령 연합군 사령부(SCAP) 맥아더 사령관 휘하의 병력을 파견했다. 이승만 한국 대통령도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사령관에 이양하는 등 혈맹관계를 형성한 국제연합군과 긴밀히 협조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구명한 국제연합군이 정전협상을 주도하자 이 대통령은 ‘통일없는 정전’에 강하게 반대했다. 이로 인해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고, 국제연합군은 이 대통령의 권한 정지까지 상정한 상비작전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70년 전 정전협정 체결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변영태는 “정전협정은 자유세계가 공산세계에 써 바친 항참서(降參書),” “가장 수치스러운 문서”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1919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일 때부터 이승만의 충실한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헨리 정(정한경) 역시 정전협정을 1938년 영국의 챔벌린과 히틀러가 체결했던 뮌헨평화협정에 비유하여 “극동의 뮌헨”(the Far Eastern Munich)이라고 비판했다.
이 대통령은 국제연합군의 주력을 형성하고 있던 미국으로부터 세 가지를 얻어내고자 했다.
첫째, 한미상호방위조약, 둘째, 일본군 보다 우월한 한국군의 육성, 셋째, 북진통일에 대한 후원이었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고, 한국군을 육성하는 대신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 의지와 반일 군사행동은 봉쇄하고자 했다.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the ROK-U.S. Mutual Defense Agreement)이 가조인된 다음 날인 8월 9일 대국민 담화에서 이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추구했던 정책의 실현이라면서 “우리의 후손이 앞으로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은 많은 혜택을 누릴 것이다. 이 분야에 있어서 한미 양국의 공동노력은 외부 침략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 우리의 안보를 오랫동안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11월 18일에 가서야 정식 발효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행동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북진통일에 대한 미국의 봉쇄의지가 있었다.
3. 결론: 70주년의 과제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과 1953년 8월 8일 경무대에서 가조인된 한미상호방위 조약은 쌍둥이였다. 70년 동안 불완전하나마 평화가 유지된 것은 정전협정 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서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정전협정의 탄생만을 기억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탄생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1953년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정전협정을 통일의 장애물로 인식했고, 역외 동맹국을 얻게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기념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묶인 미국과 함께 대한제국 이래의 대한 강역(疆域)을 수복하고, 북한 동포를 구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대통령의 이러한 북진통일론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1954년 11월 18일에 가서야 발효되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그런 의미에서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구성되는 정전체제는 공산군의 남침을 봉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군의 북진통일도 봉쇄하며, 일본군 보다 강한 한국군을 육성하되 한일 간 군사마찰도 봉쇄하는 3중 봉쇄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70년 전에 발효된 정전협정은 “한반도와 그부속도서”라는 대한민국 헌법 상 영토의 군사적 통일은 제한하고 있지만 평화적 통일이라는 헌법상 의무까지 면제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전 70주년을 맞이하며 불완전하게 나마 70년 동안유지되어 온 평화를 지속하는 동시에 헌법이 명하고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라는 과제를 대한민국 국민은 짊어지고 있다.
한반도 정전 70주년: 역사와 과제
김명섭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 서론
2023년은 한반도가 정전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70주년의 의미도 크지만, 1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이 한반도 정전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불완전하나마 지금 한반도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죽어가고 있는 많은 이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한반도 정전체제의 의미는 한반도에서 조차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들로 전후의 폐허와 가난, 그리고 풍요 속의 무관심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들조차 정전체제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주고 있지 않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의 실상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이유들 중에는 정전협상 당시 마지막 한국군 대표였고, 정전협정 조인식장에 배석했던 최덕신이 훗날 대한민국 외무장관까지 역임하고 월북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정전협상 당시 통역장교로 활약했던 이수영 대사는 프랑스 대사로 재임 중 대사관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정전 당시의 상황을 후대에게 좀 더 자세히 전해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 글은 한반도 정전의 역사와 관련해서 자주 논란이 되는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정전 70주년이 대한민국 국민 각자에게 부과하고 있는 과제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2. 한반도 정전(armistice)의 역사
1) 휴전, 정전, 정화의 차이
휴전선이라는 용어에서 보여지듯이 정전과 함께 휴전이라는 용어도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렇다면 휴전과 정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두 용어는 번역 상의 문제일 뿐 의미는 같다.
6·25전쟁 이전부터 라틴어의 arma(무기)와 stitium(정지)에서 유래되어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공통적으로 armistice라고 사용되는 용어가 일본과 한국에서 이미 ‘休戰(휴전)’이라고 번역, 소개되고 있었다. 제1차 헤이그평화회의(1899)에서 채택된 ‘육전의 법 및 관습에 관한 협약’과 그 부속서 ‘육전법 및 관습에 관한 규칙’이 일본과 대한 제국에 번역 소개될 때, armistice라는 용어는 휴전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1953년 7월 27일 성립된 armistice를 휴전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번역어를 사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협정문의 한글본과 중국어본에는 모두 정전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영어본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원문에 근거해서 정전협정이라고 쓰고 있다.
정화와 정전의 차이는 무엇일까? 정전협정문의 제2조의 소제목은 “정화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로서 정화(停火, 영문본에서는 cease-fire)와 정전(停戰, 영문본에서는 armistice)이 명확히 구별되고 있다. 정화(cease-fire)는 “잠정적 군사정전(interim military armistice)의 일부”이며, “군사정전은 정화를 포함하나 정치적, 영토적 문제를 포함하지 않고 엄격한 군사적 문제들로 제한된다”(limited strictly to military questions and would not involve any political or territorial matter). 1953년 7월 27일에 발효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정전은 정화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제반 조치들에 관한 군사적 합의를 포함한다.
[자료] 정전협정 영문본 서명 부분. (출처: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2) 정전협정에 이승만 대통령의 서명이 없는 이유
정전협정 서명란에 김일성 이름은 있고, 이승만 이름은 없다는 단순 대비를 통해 한국(군)이 정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라고 주장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정전협정은 평화조약과 달리 국가원수들이 서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장의 군사령관들이 서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이다. 때로는 이승만 대통령을 폄하하거나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훼손하기 위한 목적에서 유포되기도 한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5시 15분 프랑스 북부 콩피에뉴(Compiègne)에서 체결되고 오전 11시부터 발효된 제1차 세계대전 정전협정문도 각국 국가원수들이 서명하지 않았다. 연합군 측에서는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 프랑스) 원수와 그를 보좌했던 로슬린 웨미스(Rosslyn E. Wemyss, 영국) 제독이 서명했을 뿐이다.
6·25 전쟁 정전협정의 경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직함 아래 김일성의 서명,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라는 직함 아래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의 서명, 그리고 “국제련합군총사령관”이라는 직함 아래 마크 클라크(Mark Clark)의 서명이 있다. 이들은 모두 군사령관의 자격으로(ex officio) 서명했다. 군사령관들이 서명하는 정전협정문에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 정부 주석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이나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서명하지 않았듯이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서명할 이유는 없었다.
간혹 김일성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직함과 더불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라는 직함을 병기했음에 주목하여 김일성은 최고사령관인 동시에 국가원수로서 서명했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원수”란 영문본의 서명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군사적 계급으로서의 원수(元帥, Marshal)를 의미하는 것이지 국가수반으로서의 원수(元首, head of stat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크 클라크가 한국문 위에 “미국 륙군 대장”이라는 직함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라는 직함과 병기하고 서명한 것과 같다.중국공산당 파병부대를 이끌었던 펑더화이의 경우는 계급 없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라는 직함만을 명기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서명하지 않았더라도 한국군 총사령관이라도 서명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군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협정의 서명자들만이 당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정전협정 체결 당시에도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사령관 퍼싱(John Pershing)은 독일군의 무조건항복을 받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했고, 서명하지 않았다. 퍼싱의 서명이 없다고 해서 미군이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주장은 제기된 바가 없고, 미군은 미군 사령관이 서명하지 않은 정전협정에 기속(羈束)되었다. 6·25전쟁 정전협정문의 국제연합군 사령관 서명 역시당시 그의 통솔하에 있던 16개국 참전군 사령관들과 한국군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가 ‘통일 없는 정전’에 반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협정문에 대한 호오(好惡)가 협정의 당사자성을 부정할 수는 없고, 기속성(羈屬性)의 조각사유(阻却事由)가 될 수도 없다. 따라서 한국군이 국제연합군 사령관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환수하게 되더라도 정전협정에 대한 기속성은 계속 유지된다.
3) 정전을 유지한 것은 정전협정 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6·25전쟁 참전 16개국들 중 미국은 연인원 1,789,000명을 파병하여 가장 적은 인원을 파병한 룩셈부르크에 비해 무려 17,890배의 인원을 파병했다. 미국 의회의 비준을 받지 않고, 국제연합 헌장과 국제연합의 한반도 관련 결의들을 준수하여 침공 저지 및 평화 회복 활동에 나서는 형식으로 일본점령 연합군 사령부(SCAP) 맥아더 사령관 휘하의 병력을 파견했다. 이승만 한국 대통령도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사령관에 이양하는 등 혈맹관계를 형성한 국제연합군과 긴밀히 협조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구명한 국제연합군이 정전협상을 주도하자 이 대통령은 ‘통일없는 정전’에 강하게 반대했다. 이로 인해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고, 국제연합군은 이 대통령의 권한 정지까지 상정한 상비작전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70년 전 정전협정 체결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변영태는 “정전협정은 자유세계가 공산세계에 써 바친 항참서(降參書),” “가장 수치스러운 문서”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1919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일 때부터 이승만의 충실한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헨리 정(정한경) 역시 정전협정을 1938년 영국의 챔벌린과 히틀러가 체결했던 뮌헨평화협정에 비유하여 “극동의 뮌헨”(the Far Eastern Munich)이라고 비판했다.
이 대통령은 국제연합군의 주력을 형성하고 있던 미국으로부터 세 가지를 얻어내고자 했다.
첫째, 한미상호방위조약, 둘째, 일본군 보다 우월한 한국군의 육성, 셋째, 북진통일에 대한 후원이었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고, 한국군을 육성하는 대신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 의지와 반일 군사행동은 봉쇄하고자 했다.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the ROK-U.S. Mutual Defense Agreement)이 가조인된 다음 날인 8월 9일 대국민 담화에서 이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추구했던 정책의 실현이라면서 “우리의 후손이 앞으로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은 많은 혜택을 누릴 것이다. 이 분야에 있어서 한미 양국의 공동노력은 외부 침략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 우리의 안보를 오랫동안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11월 18일에 가서야 정식 발효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행동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북진통일에 대한 미국의 봉쇄의지가 있었다.
3. 결론: 70주년의 과제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과 1953년 8월 8일 경무대에서 가조인된 한미상호방위 조약은 쌍둥이였다. 70년 동안 불완전하나마 평화가 유지된 것은 정전협정 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서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정전협정의 탄생만을 기억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탄생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1953년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정전협정을 통일의 장애물로 인식했고, 역외 동맹국을 얻게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기념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묶인 미국과 함께 대한제국 이래의 대한 강역(疆域)을 수복하고, 북한 동포를 구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대통령의 이러한 북진통일론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1954년 11월 18일에 가서야 발효되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그런 의미에서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구성되는 정전체제는 공산군의 남침을 봉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군의 북진통일도 봉쇄하며, 일본군 보다 강한 한국군을 육성하되 한일 간 군사마찰도 봉쇄하는 3중 봉쇄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70년 전에 발효된 정전협정은 “한반도와 그부속도서”라는 대한민국 헌법 상 영토의 군사적 통일은 제한하고 있지만 평화적 통일이라는 헌법상 의무까지 면제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전 70주년을 맞이하며 불완전하게 나마 70년 동안유지되어 온 평화를 지속하는 동시에 헌법이 명하고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라는 과제를 대한민국 국민은 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