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슈&분석 Issue&Analysis] 경주 APEC 이후, 한국 외교의 설계력 시험대

[이슈&분석 Issue&Analysis]  경주 APEC 이후, 한국 외교의 설계력 시험대

이신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통일융합연구원 원장

   

2025년 10월 말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단순한 지역 경제협력체의 연례행사가 아니라, 변화하는 국제경제·안보 환경 속에서 한국이 다자외교의 방향과 경제안보 구조를 재설계할 수 있었던 결정적 시험대였다. APEC은 전 세계 GDP 60%와 세계 무역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21새 회원국이 참여하고 있다. 한국은 2005년 부산회의 이후 20년 만에 다시 의장국을 맡았고, 다음 순번을 받으려면 다시 2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이번 회의의 성과와 후속 추진력은 단발적 이벤트로 끝나서는 안 되며, 앞으로 수십 년간 한국이 어떤 외교·경제전략을 펼칠지에 관한 전략적 좌표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어야 한다.

 

한국은 이번 회의에서 “지속가능한 내일을 구축하다”라는 슬로건 아래, ‘연결(Connect)’, ‘혁신(Innovate)’, ‘번영(Prosper)’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점 의제로 내세웠다. 이 의제는 단순한 경제협력 담론을 넘어, 공급망 안정성, 인공지능(AI)과 디지털 전환, 인구 구조 변화라는 세 가지 구조적 도전에 대한 아시아태평양 차원의 대응을 시도했다. 다시 말해, APEC을 전통적 무역 협의체에서 경제안보·기술 거버넌스 플랫폼으로 확장하려는 전략적 시도였다. 그러나 다자주의 복원을 위한 실질적 행동계획이 확실히 뒤따르지 않는다면, ‘경주 선언’은 외교적 상징에 그칠 것이다.

 

APEC의 구조적 현실과 한국 의장국의 의미

 

APEC은 1989년 호주의 밥 호크 총리 제안으로 처음 논의된 뒤 출범했으며, 1993년 미국 시애틀 정상회의를 계기로 정상 간 연례 회의 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자유롭고 개방된 무역과 투자, 지역경제 통합, 기술협력을 목표로 운영되어 왔지만, WTO나 FTA와 달리 법적 구속력이 없는 ‘비구속적 협의체’라는 구조적 제약을 안고 있다. 의장국이 연간 의제를 설정하고 회원국이 ‘합의된 방향성’을 담은 선언문을 채택하는 방식은 유연성을 보장하지만, 실행력을 담보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최근 몇 년간 다자협력체의 약화 배경으로 보호무역주의의 확산, 양자협상 중심의 ‘거래외교’ 강화, 기술 패권 경쟁 심화 등을 꼽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이 의장국으로서 어떤 구조적 메시지를 제시했는지가 중요했다. 즉, 경주회의는 한국으로 하여금 단순한 회의 주최국이 아니라, 의제를 만들고 행동계획을 제시한 국가로서의 외교적 위상을 입증해야하는 자리였다.

 

‘경주 선언’의 함의와 한계

 

2025년 11월 1일 채택된 ‘경주 선언’은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 원칙을 재확인하고, 글로벌 공급망 복원력, 디지털 혁신, 인적자본 강화, 에너지 전환을 축으로 한 지속가능 성장 전략을 제시했다. 또한 AI 거버넌스와 데이터 이동 규범화, 인구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포용적 성장의 중요성이 명시되었으며,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 추진과 WTO 체제 복원을 공동 목표로 재확인했다.

 

하지만 이번 선언이 구체적 행동계획을 담보했다고 보긴 어렵다. 선언은 기존 합의를 세련되게 정리한 수준에 머물렀고, 회원국 간 이해가 엇갈리며 실질적 강제력이 부재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본회의 불참과 조기 귀국은 미국이 자신이 설계했던 전후 자유주의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를 더 이상 ‘관리(Gardening)’하기보다는, 단기적 이익과 거래 중심의 접근으로 선회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반면 시진핑 국가주석은 자유무역과 다자주의를 강조하며 미국의 공백을 자신에게 유리한 질서로 흡수하려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 대조는 경주 회의가 놓인 국제정치의 이중 지형, 즉 다자주의의 복원과 권위주의적 다자주의의 확장을 선명히 보여준다.

 

한국은 이러한 불균형 속에서도 합의문 도출에 성공하며 외교적 균형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주 선언이 실질적 역사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향후 1~2년 내 후속 협의체(working group) 가동과 이행 검증 체계 구축이 필수적이다. APEC의 비구속적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예: 공급망 복원력 평가지표, 디지털 거버넌스 표준화, 인적자원 교류 프로그램)을 구체화하는 것은 한국 외교의 과제이자 시험이다.

 

한·미·중 정상회담이 드러낸 현실의 디테일

 

경주 회의의 다자 무대보다 국제적 관심을 끈 것은 한·미, 미·중, 한·중의 양자회담이었다. 다자주의의 이상이 현실 정치의 미시적 계산 속에서 어떻게 시험받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장면이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약 3 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산업협력 패키지를 논의했으며, 이 중 약 2 000억 달러는 현금 투자, 약 1 500억 달러는 조선·해양 분야 협력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응해 미국은 한국산 자동차 및 부품에 대한 관세율을 기존 25 %에서 15 %로 인하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는 한국 수출 산업에 대한 불확실성을 일부 완화한 외교적 성과로 평가된다. 회담 일주일 전,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주요 기업 총수들과 가진 비공식 골프 라운드는 이번 합의가 단순한 외교적 절충이 아니라 민간 투자를 매개로 한 실용적 동맹 현대화 모델, 즉 정치·산업·안보 네트워크가 결합된 거래형 협력의 형태임을 시사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허가했다고 언급했지만, 이는 미 의회의 비확산 심사와 국제조약 절차를 거쳐야 하는 복합 사안이다. 건조지가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로 지정된 점은 한국의 독자 생산이 아닌, 미국의 기술·생산 통제 하에 이뤄지는 제한적 협력 구조임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 산업의 일부가 전략산업 차원에서 미국 본토로 이동·편입되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겉보기에는 협력의 확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국이 핵심 기술 주도권을 유지하며 한국의 자율성을 세밀히 조정하는 ‘악마의 디테일’이 숨어 있다.

 

미중 정상회담에서는 중국이 희토류 수출 규제를 약 1년간 유예하고, 미국산 농산물(예컨대 대두) 수입을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회담 의제에서는 대만 해협, 러시아산 원유 수입, 첨단 반도체 기술 이전 등 핵심 안보·기술 쟁점이 배제됐으며, 합의문에는 구속력 있는 이행 절차나 검증 메커니즘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양국이 구조적 경쟁을 완화하기보다는 상호 의존의 불안정을 관리하는 데 초점을 둔 ‘위기 관리형 합의’에 머물렀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여전히 전략광물 공급망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으며, 이번 합의는 근본적 완화가 아닌 전술적 조정에 그쳤다. 반면 미국은 농산물과 에너지 부문에서 단기적 실익을 얻었지만, 기술 패권과 공급망 분절이라는 구조적 갈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번 회담은 갈등의 완화라기보다 국제 무역질서와 기술 규범을 주도할 제도적 리더십의 부재를 다시 한 번 드러낸 셈이다. 회담의 본질은 ‘정책적 상호의존의 관리(managed interdependence)’를 재확인한 데 있다. 양국은 경쟁의 구조를 바꾸기보다 상호 충돌을 최소화하며 불안정한 균형을 유지하는 방향을 택했다. 그 결과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과 기술 거버넌스의 공백은 여전히 메워지지 않았고, 다자협력의 복원력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한·중 정상회담은 11년 만의 중국 최고지도자 방한이라는 상징적 계기를 통해 양국 관계의 복원과 실리 중심 협력의 방향을 확인한 자리였다. 양국은 무비자 입국 확대, 한·중 FTA 2단계 협상 재개, AI·바이오·그린산업·실버경제 등 차세대 산업 협력 확대에 합의하며 관계 정상화의 의지를 표명했다. 이는 사드(THAAD) 갈등 이후 경색된 양국 관계를 완화하고 경제 협력의 회복 기반을 마련하려는 실용적 조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전략광물, 사이버보안, 기술 통제 등 핵심 산업·안보 분야에서는 여전히 구조적 불신이 존재했다. 중국은 한국을 완전히 미국의 전략구도에 편입시키지 않기 위한 균형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으며, 한국은 중국을 북한 문제의 제한적 영향 채널로 활용하려 한다. 하지만 북·중·러 협력의 심화와 미·중 경쟁의 구조화 속에서 이러한 균형 외교의 공간은 점차 좁아지고 있다. 중국이 제시하는 ‘다극적 질서’와 한국이 추구하는 ‘규범 기반 다자주의’ 간의 간극은 여전히 크며, 양국 관계는 전략적 신뢰 구축보다는 관리적 협력의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감정적 복원이나 선언적 균형에 그치지 않고, 경제안보·기술·공급망·기후 등 실질 협력의 제도화를 추진할 수 있는 전략적 협의체 구축에 나서야 한다. 한·중 관계의 안정성은 외교적 온도보다 구조적 설계에 달려 있으며, 이번 회담은 그 설계의 첫 시험대였다.

 

결국 세 정상회담은 외교적 화려함의 이면에 숨겨진 구조적 현실을 드러냈다. 각국이 협력의 언어를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제도화와 신뢰 구축의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이번 일련의 회담은 한국 외교가 단순히 균형을 맞추는 조정자의 역할을 넘어, 경쟁과 협력이 교차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새로운 규범과 구조를 설계하는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한국의 과제와 리스크

 

경주 APEC 의장국 경험은 한국 외교에 세 가지 핵심 과제를 남겼다. 첫째, 선언을 행동으로 전환할 제도적 실행 구조의 확립이다. 경주 선언이 외교적 수사에 머물지 않으려면, 한국이 주도적으로 후속 협의체를 가동하고 회원국이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공급망 복원력 지표, AI 윤리·데이터 표준, 인구 구조 변화 대응 연구 네트워크 같은 프로젝트를 ‘경주 이행계획’으로 발전시킨다면, APEC의 비구속적 구조를 일정 부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양자외교와 다자협력의 유기적 연계 강화다. 한·미·중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경제·기술·안보 협력이 다자 틀 안에서 제도화되지 않으면, APEC은 단순한 회의체로 그칠 위험이 있다. 한국은 양자 합의를 다자 협력으로 확장시키는 정책 중개자이자 구조 설계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이는 중견국 외교의 ‘허브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현실적 경로다.

 

셋째, 정책 지속성과 외교 전략의 명확한 방향 설정이다. 한국은 이번 회의에서 미·중 사이의 실리를 조정했지만, 미국의 ‘탈중국 공급망 재편’과 중국의 ‘전략적 블록화’가 병행될 경우 외교적 압박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제 전략적 모호성은 유지 불가능하다. 한국은 한미동맹의 확고한 기반 위에서 한중 관계를 실용적이고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전략적 명확성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미일, 한중일 등 소다자 협력체제를 적극 활용하고, 일본과의 협력 역시 기술·안보·공급망 협력의 핵심 축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최근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다카이치 신임 총리와의 실무 연속성 확보는 관계 복원의 모멘텀을 이어갈 수 있는 긍정적 신호였다. 동시에 호주, 캐나다, 독일 등 유사한 전략환경의 중견국들과의 연대를 강화해 기술표준·디지털 규범·인도태평양 안보 등 다층적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리스크도 명확하다. APEC의 비구속적 구조는 선언의 실효성을 약화시키며, 미국의 다자주의 회피가 지속될 경우 경주 선언의 실행력은 한계에 직면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이 주도한 AI 협력과 포용 성장 의제는 선진국-개도국 간 이해 대립으로 인해 구체화 단계에서 난항이 예상된다. 향후 후속 회의에서는 회원국들이 공감할 수 있는 행동 중심의 제도 설계, 즉 ‘공동의 목표’를 실천으로 전환할 수 있는 현실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요컨대, 한국 외교의 과제는 더 이상 모호한 균형이 아니라 명확한 방향성과 실질적 연대를 기반으로 한 다층적 협력의 설계에 있다. 이러한 전략적 명확성을 토대로 한국은 변화하는 국제 환경 속에서 전략경제와 기술외교의 핵심 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회의의 끝, 설계의 시작

 

경주 APEC 정상회의는 단순한 외교 행사가 아니라, 한국이 ‘의제를 소비하는 외교’에서 ‘의제를 설계하는 외교’로 이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실험대였다. 이번 회의에서 한국은 중견국 외교의 새로운 작동방식을 제시했지만, 그 성패는 선언이 아니라 이행과 제도화의 지속성에 달려 있다. 선언은 문서로 남지만, 실행은 신뢰로 남는다.

 

이제 한국은 APEC을 통해 축적한 협상력과 네트워크를 토대로 기술, 공급망, 디지털 규범의 전략 삼각축을 설계해야 한다. 이는 미·중 경쟁의 구조적 틈새 속에서 한국이 단순한 조정자나 피동적 중간국이 아니라, 지역 질서를 연결하고 제도적 균형을 설계하는 주체적 행위자로 자리매김하는 길이다.

 

경주의 성과는 외교적 이벤트의 화려함이 아니라, 이를 얼마나 정책적 구조와 실행 가능한 거버넌스로 전환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수사(修辭)가 아니라, 한국이 다자체제의 신뢰와 실행력을 재설계할 정책적 엔진을 구축하는 일이다. 경주는 그 방향을 제시했고, 이제 그 길을 실제로 설계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