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韓美友好인가
조완규
전 교육부장관, 협회 수석고문
韓美友好協會가 발족한 것이 1991년 6월이어서 이제 30년이 된다. 당시 대학생의 反美運動이 극심하여 大學마다 校門 안에 깔아 놓은 星條旗를 밟고 지나가게 한다든가, 美 文化院을 점거하거나 美國 大使館 앞길에 화염병을 던지는 등 反美성향 學生집단 그리고 일부 시민의 시위 가담으로 평온한 날이 없었다. 이 같은 사태를 우려하며 한미간 갈등이 결코 大韓民國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각계 元老 및 敎授 등 知性人이 ‘韓美友好協會’를 조직한 것이다. 당시 대학가의 과격한 반미운동을 감안한다면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 한미간의 우호를 주장할 상황이 아니었고, 더구나 한미간의 우호 증진을 위한 협회의 조직 구상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런 가운데 사회 重鎭인사들이 협회를 조직하였고 한미간 우호와 관련된 각종 계획 및 행사 등 한미우호사업을 주관하여 왔다. 이 시점에서 한미간의 유대관계의 중요성을 짚어 보려고 한다.
1945년 8월 초 美國, 中國, 소련 3개국 頂上이 얄타에 모여 태평양전쟁 종전 후 日本 식민지인 韓半島의 통치기구와 관련한 協約을 매젔다. 결국 38선 以北은 소련군이, 남쪽은 美軍이 사령관인 16개 聯合軍이 관리하였다. 소련 치하의 이북은 共産黨이 통치하는 공산국가로, 그리고 연합군 통치의 남쪽은 自由民主主義 구가체제 틀을 구축하였다. 그간 李氏 王朝 500년, 그리고 곧 이은 日本 天皇體制아래 植民地로 36년을 보냈다. 그리고 解放을 맞은 한반도의 남쪽은 극심한 左右翼 싸움을 겪는 가운데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익혔다. 자유민주주의를 규정한 憲法에 따라 大統領과 國會議員 선거를 치렀다. 특히 국가원수 그리고 국회의원 후보자의 치열한 유세광경을 처음 목격한 우리는 감회가 깊었다. 한강변에 모인 100만 시민을 대상으로 한 申翼熙 대통령 후보의 유세 현장을 보면서 시민은 민주주의의 실체를 실감하며 민주주의를 배웠고 결국 1948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탄생한 것이다. 3년간의 美軍政 통치목표는 바로 직접선거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대한민국의 틀을 구축하는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미군정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또한 미군정은 도제식 日帝의 대학 교육 제도를 미국식 綜合大學 체제로 재편성하였고 기업체 經營方式 역시 미국식 自由經濟 체제로 개편하였다.
해방 직후 열악한 대학을 마친 졸업생 다수는 곧 미국으로 留學하여 그곳 대학에서 高位 學位 과정을 이수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 사회 체제를 경험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6.25 전쟁 전후하여 약 5,000명이 미국 대학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하였다. 그들 가운데 人文, 社會 系列 碩, 博士學位 취득자는 귀국하여 母國의 民主化체제 및 經濟構造 개혁을 주도하였다. 科學技術분야 학위취득자는 母國 대학교 敎授 혹은 연구기관 硏究要員으로 발탁되어 우리나라 과학기술 교육 및 발전의 주역을 맡았다. 미국은 빈곤한 나라, 한국 학생에게 高等敎育 修學의 기회를, 敎授 혹은 硏究要員에는 미국 국내 대학 혹은 연구기관에서 硏修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의 한국 대학 교수 및 연구기관 연구 요원 대다수는 미국에서 수학 혹은 연구 생활을 하였고 현재도 미국 연구기관과 활발히 학술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남북 대치 속에서도 半世紀 만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그리고 세계 10위권의 經濟大國 반열에 포함된 것은 바로 미국의 지원이 있어 가능하였다.
北韓軍의 南侵으로 발발한 3년간의 6.25 전쟁 중 미국은 16개 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이 끌고 참전하였다. 미국은 4, 5만의 젊은 청년을 未知의, 地球 끝 조그마한 나라로 파견하였고 전쟁 중 약 2만 명의 젊은 將兵이 목숨을 잃거나 혹은 불구의 戰傷者가 되었다. 그들의 희생 결과, 북한군의 남침은 저지되었고 끝내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大韓民國’이 생존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우방 미국은 그들의 젊은 자녀 2, 3만 명을 대한민국에 주둔시켜 끊임없는 北韓의 南侵 시도를 봉쇄하고 있다. 이같이 미국과의 血盟關係는 이미 반세기가 넘는다. 南北 대치의 긴장 속에서도 學術교류, 經濟협력 그리고 防衛 관련 분야의 한미 간 유대관계는 더욱 공고해졌고 끝내 우리는 ‘漢江변의 奇蹟’을 창출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그들의 정치 상황에 따라 駐韓美軍 철수 등 한국을 버릴 수 있다. 실제로 지미 카터 大統領은 한 때 美軍 撤收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미 간의 강한 反對 여론을 배제하지 못하고 결국 철군이 아니라 兵力 減縮으로 그쳤다. 1994년 그는 퇴임 후 北韓을 방문, 金日成과 만났다. 人權을 주장하는 카터가 獨裁者 김일성을 만나 둘이 파안대소하는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카터 대통령은 한미간의 우호 증진보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더 무게를 두었던 것 같다. 한국을 방문하고서도 朴正熙 大統領과는 소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지속되던 한국 국민과 미국 市民 간의 끈끈한 우호 관계는 흔들리지 않았다. 더욱이 人種 紛爭이 끊이지 않는 萬里 異域의 나라 미국에서 移民 生活로 연명하는 수백만 우리 僑胞의 安全과 保護를 위하여서도 미국 市民과의 돈독한 우호 관계 유지는 우리에게 있어서 필수적 요건이며 무 자르듯 단칼로 베어 관계를 단절할 수는 없다. 해방 후의 荒蕪地요, 세계 最貧國이요,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조그마한 나라의 人文, 社會科學 분야 학생이 미국 내 대학의 장학금으로 미국에서 수학하는 동안 미국의 自由民主主義를 배웠고, 또한 미국 대학에 유학 혹은 연구기관에서 연구 요원으로 활동한 과학기술계 인재는 기술개발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이 나라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발전에 있어 미국의 기여는 막대하다. 현재도 南北 대치의 긴장 속에서도 우리가 安全하고 평온한 日常生活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거액을 부담하면서도 그들 젊은 장병 수만 명을 우리나라에 常駐시키고 킨 미국이 있어 가능하며 이런 점을 생각할 때 미국과의 우호 관계는 결코 경시할 수 없다. 結論은 간단하다. 지난 70년 最貧國에서 세계 경제 10위권 국가로, 그리고 自由民主主義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後援과 保護가 있어 가능하였고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미국과의 우호 관계는 더 견고해야 하고 따라서 한미우호협회의 역할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It has been 30 years since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KAFS) was founded. At that time, there was no tranquil day due to anti-American student groups and some citizens' participation in protests, such as letting universities step on the American flag laid in the school gate, occupying the U.S. cultural center or throwing Molotov cocktails in front of the U.S. Embassy. Concerned about the situation, intellectuals from all walks of life, including social leaders and professors, who judged that the conflict between Korea and the United States would never help the develop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organized the KAFS. Given the radical anti-U.S. movement of students in the universities at the time, no one tried to claim friendship between Korea and the United States, and the KAFS's organizational initiative to promote friend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was a kind of adventure. Meanwhile, senior members of society organized the KAFS and developed various projects and events for ROK-U.S. friendship.
In early August 1945, the leaders of the three countries, the U.S., China and the Soviet Union, gathered in Yalta to sign an agreement on the governing body of the Korean Peninsula, a Japanese colony, after the end of the Pacific War. Eventually, the north of the 38th parallel was controlled by the Soviet Union and the 16 coalition forces led by the commander of U.S. military in the south. The Soviet Union established a communist state in the north, and a liberal democratic system in the south of allied rule, after the 500 years of the Chosun Dynasty and followed by the Japanese emperor's control for 36 years.
In 1945, the liberated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has learned American liberal democracy amid intense left-right-wing conflict. Under the Constitution, which defines liberal democracy, the president and the National Assembly members held elections. In particular, we were deeply moved to witness the fierce campaign of the head of state and the candidate of the National Assembly for the first time. Watching Presidential candidate Shin Ik-hee's campaign for 1 million citizens near the Han River, citizens learned democracy by realizing the reality of democracy, and eventually, the Republic of Korea was born as a liberal democratic state in 1948. The goal of the three-year U.S. military government was to establish a framework for the Republic of Korea by electing president and lawmakers through direct elections, and the role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crucial in the process. In addition, the U.S. military government reorganized the apprenticeship-style Japanese university system into the American-style university system, and also the corporate management reorganized to the American free economy system.
Shortly after Korea’s independence, many of the graduates, who finished their studies at poor universities in Korea, went abroad to the United States and completed their studies for the high-level degrees. While in students they had experienced an American-style democratic social system. Statistics show that around 5,000 students finished studies at the American universities around period of the Korean War of 1950. Those who earned master's or doctor’s degree in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returned to Korea, and led the reform the home country to the democratic system and the economic structure. Degree holders in science and technology had a chance to be appointed to professors of the Korean universities or research fellows at the research institutes, and they played a leading role in education and development of the science and technology. The United States provided chances to students from Korea, then one of the poor countries, to study for higher degrees, and then they were allowed to serve as professors or researchers in the institutions of the United States. Most of professors and researchers who had a chance to study as students or as fellows in US, have still kept an academic cooperation and exchange with professors and research fellows in the i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Because of the U. S.‘s support, Korea would be possible to grow to one of the world's top 10 economies. The strong support of the United States, Korea has been able to establish for the first time to a liberal democratic state despite the inter-Korean confrontation for more than an half century.
During the three-year Korean War in 1950’s which broke out by the North Korea's invasion, the United States led a 16-nation coalition to defend the ROK. The United States sent 40,000~50,000 young men to secure a country which was a small located in the world-end, and about 20,000 of the U. S. young soldiers were killed or mutilated during the war. As a result of their sacrifice, the North Korea’s invasion was stopped and eventually the liberal democratic "Republic of Korea" was able to survive. Thereafter, the U.S.‘s several ten thousand of young men has stationed to South Korea to block any attempt of the North Korea’s invasion. As such, blood alliance with the United States has already been over half a century. Despite the tension due to the North Korea, South Korea have kept the academic exchange, economic cooperation and even in the defense-related fields with the U. S., we could create a miracle, so called, a "miracle along the Han River."
Meanwhile, there have been changed the world situation and the international order. However, no matter what the circumstances were, the close friendship between the Korean people and the U.S. citizens was not shaken. Moreover, maintaining a strong friendship with American citizens is an essential requirement for the safety and protection of millions of Koreans living in immigration in the United States, a country where racial disputes continue, and we cannot cut the traditional relation off with a single sword. A post-liberation wilderness, poorest country in the world,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students in a small country who had never experienced democracy learned liberal democracy while studying in the United States.
Like this, the U.S.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our country is essential. It is possible for us to lead a safe and peaceful daily life despite the tension of the confrontation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because the U.S. have sent tens of thousands of young soldiers to station in Korea, and given this, friendly relations with the U.S. can never be underestimated.
The conclusion is simple. It was possible to grow from the poorest country to the world's 10th-largest economy and to become a liberal democracy in the past 70 years because of the strong support of the U.S. In this aspect, the role of the KAFS should be strengthened farther.
영원한 친구들 30주년 특별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왜 韓美友好인가
조완규
전 교육부장관, 협회 수석고문
韓美友好協會가 발족한 것이 1991년 6월이어서 이제 30년이 된다. 당시 대학생의 反美運動이 극심하여 大學마다 校門 안에 깔아 놓은 星條旗를 밟고 지나가게 한다든가, 美 文化院을 점거하거나 美國 大使館 앞길에 화염병을 던지는 등 反美성향 學生집단 그리고 일부 시민의 시위 가담으로 평온한 날이 없었다. 이 같은 사태를 우려하며 한미간 갈등이 결코 大韓民國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각계 元老 및 敎授 등 知性人이 ‘韓美友好協會’를 조직한 것이다. 당시 대학가의 과격한 반미운동을 감안한다면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 한미간의 우호를 주장할 상황이 아니었고, 더구나 한미간의 우호 증진을 위한 협회의 조직 구상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런 가운데 사회 重鎭인사들이 협회를 조직하였고 한미간 우호와 관련된 각종 계획 및 행사 등 한미우호사업을 주관하여 왔다. 이 시점에서 한미간의 유대관계의 중요성을 짚어 보려고 한다.
1945년 8월 초 美國, 中國, 소련 3개국 頂上이 얄타에 모여 태평양전쟁 종전 후 日本 식민지인 韓半島의 통치기구와 관련한 協約을 매젔다. 결국 38선 以北은 소련군이, 남쪽은 美軍이 사령관인 16개 聯合軍이 관리하였다. 소련 치하의 이북은 共産黨이 통치하는 공산국가로, 그리고 연합군 통치의 남쪽은 自由民主主義 구가체제 틀을 구축하였다. 그간 李氏 王朝 500년, 그리고 곧 이은 日本 天皇體制아래 植民地로 36년을 보냈다. 그리고 解放을 맞은 한반도의 남쪽은 극심한 左右翼 싸움을 겪는 가운데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익혔다. 자유민주주의를 규정한 憲法에 따라 大統領과 國會議員 선거를 치렀다. 특히 국가원수 그리고 국회의원 후보자의 치열한 유세광경을 처음 목격한 우리는 감회가 깊었다. 한강변에 모인 100만 시민을 대상으로 한 申翼熙 대통령 후보의 유세 현장을 보면서 시민은 민주주의의 실체를 실감하며 민주주의를 배웠고 결국 1948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탄생한 것이다. 3년간의 美軍政 통치목표는 바로 직접선거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대한민국의 틀을 구축하는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미군정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또한 미군정은 도제식 日帝의 대학 교육 제도를 미국식 綜合大學 체제로 재편성하였고 기업체 經營方式 역시 미국식 自由經濟 체제로 개편하였다.
해방 직후 열악한 대학을 마친 졸업생 다수는 곧 미국으로 留學하여 그곳 대학에서 高位 學位 과정을 이수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 사회 체제를 경험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6.25 전쟁 전후하여 약 5,000명이 미국 대학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하였다. 그들 가운데 人文, 社會 系列 碩, 博士學位 취득자는 귀국하여 母國의 民主化체제 및 經濟構造 개혁을 주도하였다. 科學技術분야 학위취득자는 母國 대학교 敎授 혹은 연구기관 硏究要員으로 발탁되어 우리나라 과학기술 교육 및 발전의 주역을 맡았다. 미국은 빈곤한 나라, 한국 학생에게 高等敎育 修學의 기회를, 敎授 혹은 硏究要員에는 미국 국내 대학 혹은 연구기관에서 硏修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의 한국 대학 교수 및 연구기관 연구 요원 대다수는 미국에서 수학 혹은 연구 생활을 하였고 현재도 미국 연구기관과 활발히 학술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남북 대치 속에서도 半世紀 만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그리고 세계 10위권의 經濟大國 반열에 포함된 것은 바로 미국의 지원이 있어 가능하였다.
北韓軍의 南侵으로 발발한 3년간의 6.25 전쟁 중 미국은 16개 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이 끌고 참전하였다. 미국은 4, 5만의 젊은 청년을 未知의, 地球 끝 조그마한 나라로 파견하였고 전쟁 중 약 2만 명의 젊은 將兵이 목숨을 잃거나 혹은 불구의 戰傷者가 되었다. 그들의 희생 결과, 북한군의 남침은 저지되었고 끝내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大韓民國’이 생존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우방 미국은 그들의 젊은 자녀 2, 3만 명을 대한민국에 주둔시켜 끊임없는 北韓의 南侵 시도를 봉쇄하고 있다. 이같이 미국과의 血盟關係는 이미 반세기가 넘는다. 南北 대치의 긴장 속에서도 學術교류, 經濟협력 그리고 防衛 관련 분야의 한미 간 유대관계는 더욱 공고해졌고 끝내 우리는 ‘漢江변의 奇蹟’을 창출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그들의 정치 상황에 따라 駐韓美軍 철수 등 한국을 버릴 수 있다. 실제로 지미 카터 大統領은 한 때 美軍 撤收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미 간의 강한 反對 여론을 배제하지 못하고 결국 철군이 아니라 兵力 減縮으로 그쳤다. 1994년 그는 퇴임 후 北韓을 방문, 金日成과 만났다. 人權을 주장하는 카터가 獨裁者 김일성을 만나 둘이 파안대소하는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카터 대통령은 한미간의 우호 증진보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더 무게를 두었던 것 같다. 한국을 방문하고서도 朴正熙 大統領과는 소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지속되던 한국 국민과 미국 市民 간의 끈끈한 우호 관계는 흔들리지 않았다. 더욱이 人種 紛爭이 끊이지 않는 萬里 異域의 나라 미국에서 移民 生活로 연명하는 수백만 우리 僑胞의 安全과 保護를 위하여서도 미국 市民과의 돈독한 우호 관계 유지는 우리에게 있어서 필수적 요건이며 무 자르듯 단칼로 베어 관계를 단절할 수는 없다. 해방 후의 荒蕪地요, 세계 最貧國이요,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조그마한 나라의 人文, 社會科學 분야 학생이 미국 내 대학의 장학금으로 미국에서 수학하는 동안 미국의 自由民主主義를 배웠고, 또한 미국 대학에 유학 혹은 연구기관에서 연구 요원으로 활동한 과학기술계 인재는 기술개발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이 나라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발전에 있어 미국의 기여는 막대하다. 현재도 南北 대치의 긴장 속에서도 우리가 安全하고 평온한 日常生活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거액을 부담하면서도 그들 젊은 장병 수만 명을 우리나라에 常駐시키고 킨 미국이 있어 가능하며 이런 점을 생각할 때 미국과의 우호 관계는 결코 경시할 수 없다. 結論은 간단하다. 지난 70년 最貧國에서 세계 경제 10위권 국가로, 그리고 自由民主主義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後援과 保護가 있어 가능하였고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미국과의 우호 관계는 더 견고해야 하고 따라서 한미우호협회의 역할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It has been 30 years since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KAFS) was founded. At that time, there was no tranquil day due to anti-American student groups and some citizens' participation in protests, such as letting universities step on the American flag laid in the school gate, occupying the U.S. cultural center or throwing Molotov cocktails in front of the U.S. Embassy. Concerned about the situation, intellectuals from all walks of life, including social leaders and professors, who judged that the conflict between Korea and the United States would never help the develop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organized the KAFS. Given the radical anti-U.S. movement of students in the universities at the time, no one tried to claim friendship between Korea and the United States, and the KAFS's organizational initiative to promote friend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was a kind of adventure. Meanwhile, senior members of society organized the KAFS and developed various projects and events for ROK-U.S. friendship.
In early August 1945, the leaders of the three countries, the U.S., China and the Soviet Union, gathered in Yalta to sign an agreement on the governing body of the Korean Peninsula, a Japanese colony, after the end of the Pacific War. Eventually, the north of the 38th parallel was controlled by the Soviet Union and the 16 coalition forces led by the commander of U.S. military in the south. The Soviet Union established a communist state in the north, and a liberal democratic system in the south of allied rule, after the 500 years of the Chosun Dynasty and followed by the Japanese emperor's control for 36 years.
In 1945, the liberated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has learned American liberal democracy amid intense left-right-wing conflict. Under the Constitution, which defines liberal democracy, the president and the National Assembly members held elections. In particular, we were deeply moved to witness the fierce campaign of the head of state and the candidate of the National Assembly for the first time. Watching Presidential candidate Shin Ik-hee's campaign for 1 million citizens near the Han River, citizens learned democracy by realizing the reality of democracy, and eventually, the Republic of Korea was born as a liberal democratic state in 1948. The goal of the three-year U.S. military government was to establish a framework for the Republic of Korea by electing president and lawmakers through direct elections, and the role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crucial in the process. In addition, the U.S. military government reorganized the apprenticeship-style Japanese university system into the American-style university system, and also the corporate management reorganized to the American free economy system.
Shortly after Korea’s independence, many of the graduates, who finished their studies at poor universities in Korea, went abroad to the United States and completed their studies for the high-level degrees. While in students they had experienced an American-style democratic social system. Statistics show that around 5,000 students finished studies at the American universities around period of the Korean War of 1950. Those who earned master's or doctor’s degree in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returned to Korea, and led the reform the home country to the democratic system and the economic structure. Degree holders in science and technology had a chance to be appointed to professors of the Korean universities or research fellows at the research institutes, and they played a leading role in education and development of the science and technology. The United States provided chances to students from Korea, then one of the poor countries, to study for higher degrees, and then they were allowed to serve as professors or researchers in the institutions of the United States. Most of professors and researchers who had a chance to study as students or as fellows in US, have still kept an academic cooperation and exchange with professors and research fellows in the i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Because of the U. S.‘s support, Korea would be possible to grow to one of the world's top 10 economies. The strong support of the United States, Korea has been able to establish for the first time to a liberal democratic state despite the inter-Korean confrontation for more than an half century.
During the three-year Korean War in 1950’s which broke out by the North Korea's invasion, the United States led a 16-nation coalition to defend the ROK. The United States sent 40,000~50,000 young men to secure a country which was a small located in the world-end, and about 20,000 of the U. S. young soldiers were killed or mutilated during the war. As a result of their sacrifice, the North Korea’s invasion was stopped and eventually the liberal democratic "Republic of Korea" was able to survive. Thereafter, the U.S.‘s several ten thousand of young men has stationed to South Korea to block any attempt of the North Korea’s invasion. As such, blood alliance with the United States has already been over half a century. Despite the tension due to the North Korea, South Korea have kept the academic exchange, economic cooperation and even in the defense-related fields with the U. S., we could create a miracle, so called, a "miracle along the Han River."
Meanwhile, there have been changed the world situation and the international order. However, no matter what the circumstances were, the close friendship between the Korean people and the U.S. citizens was not shaken. Moreover, maintaining a strong friendship with American citizens is an essential requirement for the safety and protection of millions of Koreans living in immigration in the United States, a country where racial disputes continue, and we cannot cut the traditional relation off with a single sword. A post-liberation wilderness, poorest country in the world,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students in a small country who had never experienced democracy learned liberal democracy while studying in the United States.
Like this, the U.S.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our country is essential. It is possible for us to lead a safe and peaceful daily life despite the tension of the confrontation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because the U.S. have sent tens of thousands of young soldiers to station in Korea, and given this, friendly relations with the U.S. can never be underestimated.
The conclusion is simple. It was possible to grow from the poorest country to the world's 10th-largest economy and to become a liberal democracy in the past 70 years because of the strong support of the U.S. In this aspect, the role of the KAFS should be strengthened farther.
영원한 친구들 30주년 특별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