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6∙25 공정’ : ‘항미원조’(抗美援朝), 과연 정의의 전쟁인가?
김 순 수
육군사관학교
정치학 교수
지난달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는 6∙25전쟁 명예훈장 수여식이 있었다. 한∙미 정상회담차 미국을 방문한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관한 한국전 영웅 퍼켓 예비역 대령의 명예훈장 수여식이 진행된 것이다.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서 6∙25전쟁시 중국군과 맞서 싸운 영웅에 대한 훈장 수여식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작년 중국에서도 ‘항미원조전쟁 참전 70주년’을 맞아 중국공산당 중앙과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등 세 곳의 명의로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 출신 노병들에게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 기념 훈장을 수여했다. 뿐만 아니라 금년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기념해 ‘7∙1 훈장’을 신설하고 6∙25 전쟁 당시 연합군 100여명을 사살해 중국과 북한에서 ‘영웅’ 대우를 받은 차이윈전(紫雲振) 등 3명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북∙중 동맹의 상징으로서 6∙25전쟁시 미군(유엔군)과 맞서 싸운 ‘영웅’들에 대한 훈장 수여였던 것이다.
중국은 최근 들어 6∙25전쟁에 대한 왜곡(소위 6∙25 공정)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난 4월 중국은 6∙25전쟁을 아예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왜곡 보도했다. 공산당 산하기관인 중국인권연구학회 보고서를 인용해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겼으며, 그들 대부분은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없다”고 기술했으며, 기존의 ‘항미원조’ 용어는 쏙 빼버렸다.
6∙25전쟁 발발 71주년에 즈음하여 중국의 6∙25전쟁에 대한 왜곡 실태와 의도, 그리고 북∙중 관계의 현주소를 조망해 보고자 한다.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을 지원(支援), 아니면 지원(志願)?
▲ 6·25전쟁시 항미원조·보가위국 선전물/패배를 모르던 미국에 첫 패배를 안겼다고 선전하는 게시물 사진 : 인민망(人民網)
중국의 6∙25전쟁 역사 왜곡 분위기가 최근 들어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의 중학교 국정(國定) 교과서와 국가공식 역사서를 보면 6∙25전쟁을 ‘항미원조전쟁’ 제하에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이 폭발했다”라는 내용으로 본문이 시작된다. 작년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 대회시 시진핑 주석 역시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이 폭발했다. 미국 정부는 세계 전략과 냉전 사유에서 출발해 조선 내전에 무장간섭을 결정하고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미래 중국을 이끌 ‘중국 공산당 꿈나무’인 중국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서도 6∙25전쟁을 내전으로 정의하고, 북한의 남침을 부인한데 이어 중국 외교부도 사실상 동조하고 있는 분위기다. 이처럼 중국 공산당과 교육기관의 공식적 역사왜곡에 더해 민간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개인 블로거와 1인 매체들도 가세하여 6∙25전쟁에 대한 중국 정부의 메시지를 보다 강력하고 집요하게 전파한다. 이러한 컨텐츠 상당수는 중화 우월주의, 인민해방군의 필승은 물론 미국에 절대 굴복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의 기습침략(남침)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한 결의한(제82호)에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미군 역시 유엔안보리 결의안(제83호)에 따라 결성된 유엔군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중국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비밀해제된 소련의 기록문서를 토대로 6∙25전쟁을 연구한 선즈화(沈志華) 중국교수 역시 “아시아 혁명의 책임자를 자처한 마오쩌둥(毛澤東)은 김일성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는 주장과 함께 북한 남침을 인정한다. 6∙25전쟁 당시 2만 6천여명을 파병하여 516명이 전사한 캐나다 조야(朝野)에서는 최근 중국의 이러한 왜곡을 두고 “6∙25전쟁 당시 중국의 역할을 찬양하는 것은 마치 1939년 독일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한 것을 기리는 것과 똑같다”고 분노한다.
이러한 중국의 왜곡을 반박할 수 있는 일례로 6∙25전쟁 참전시 중국군 부대명칭을 들 수 있다.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면서 부대명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결국 마오쩌둥은 ‘인민지원군’(人民志願軍)의 깃발아래 압록강을 넘도록 지시하였다. 만일 동북지역의 정규군인 인민해방군을 파병할 경우 중국 전역이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확전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지원’(支援, support)이 아닌 자발적으로 나서는 ‘지원’(志願, volunteer)의 명분으로 파병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6∙25전쟁을 내전으로 왜곡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두 ‘지원’ 중 어떤 ‘지원’을 해서도 안된다. 돕든 원하든 내전에 대한 개입이 되는 것이다. 더불어 중국이 의미를 두는 ‘항미원조전쟁’ 구호 역시 6∙25전쟁을 내전으로 전제할 경우 역사왜곡의 자충수가 된다. 원조(援朝)라면 북한에 대한 지원(支援)일테니. 참고로 베트남전에 대한 중국의 표현을 보면 중국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중국은 베트남전을 6∙25전쟁의 ‘항미원조’와 달리 ‘원월항미’(援越抗美)로 표현한다. 당시 중국을 제외한 사회주의권 국가에서 ‘항미원월’로 표현한데 반해 중국은 ‘항미’를 뒤에 위치시킴으로써 베트남전은 베트남 인민들이 주체적으로 싸워야 하며(인민전쟁), 중국은 보조적 역할에 머무르겠다는 의도를 내 보인 것이다.
‘항미원조전쟁’은 정의의 전쟁?
지금까지 6∙25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북침설과 유도설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북한의 남침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후 구소련의 6∙25전쟁 관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6∙25전쟁은 스탈린의 승인과 마오쩌둥의 지원 하에 김일성이 주도하여 일으킨 남침전쟁이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자 북한은 6∙25전쟁이 ‘정의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통상적인 기준에 따르면 ‘정의의 전쟁’은 정당한 원인과 의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북한은 6.25전쟁이 “조국해방전쟁인 동시에 국내외 반동세력을 반대하는 첨예한 계급투쟁이었으며, 인민민주주의 제도를 고수하기 위한 혁명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은 남한을 미국과 일본의 이중식민지로 보고,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이 불가피하며, 전쟁을 통해 미국을 남한에서 쫓아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민족해방전쟁론’을 제기하였다. 한마디로 6∙25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론’은 맑스∙레닌의 ‘계급전쟁 불가피론’과 마오쩌둥의 ‘인민전쟁론’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면 6∙25전쟁에 대한 중국의 인식은 어떠한가? 역사적으로 국공내전을 경험한 중국공산당은 북한의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맑스∙레닌의 ‘계급전쟁 불가피론’과 마오쩌둥의 ‘인민전쟁론’을 그대로 수용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발언을 인용해보면, 항미원조전쟁 60주년 기념 좌담회(당시 부주석)에서 “60년 전에 발생한 전쟁은 제국주의가 중국 인민에게 강요한 것이었으며, 영웅적인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 인민, 군대와 더불어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장비 등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언급했다. 10년후인 2020년 70주년 기념식에서 시진핑 주석은 “조선전쟁에 중국이 참전한 것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행동이며, 정의의 승리이자 평화의 승리, 인민의 승리”라고 언급하면서 “이를 통해 세계 평화와 인류의 진보에 큰 공헌을 했다”고 주장했다. 시진핑 역시 6∙25전쟁은 ‘정의의 전쟁’이었다는 주장이다.
북한과 중국 공히 6∙25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었으며, 민족해방과 세계평화를 위해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명백한 오류를 안고 있다. 첫째, 서구의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경제적 동기에 의한 계급전쟁은 불가피한가에 대한 비판이다.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정치적 이유로 평화공존이 가능하기에 전쟁이 유일한 계급갈등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6∙25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6∙25전쟁이 미국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남한의 민족주의 세력이 북한과 함께 미국의 지배와 맞서 싸운 정당한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미국이 6∙25전쟁에 부당하게 개입하여 민족해방에 실패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측과는 달리 남한내 동조반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무력도발에 맞서 싸웠다. 따라서 6∙25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 아니라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자유를 지켜낸 ‘자유수호전쟁’이었던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혈맹인가?
최근 중국의 ‘6∙25 공정’, 즉 역사왜곡을 정확히 진단하려면 북한에 대한 중국의 인식은 물론, 시진핑-김정은 시기 북∙중 관계를 이해해야만 한다. 북∙중 간의 역사적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사료를 제시한다.
“중국인민은 북벌(北伐)의 전화(戰火) 속에서, 장정(長征)의 길에서, 항일(抗日)의 간고한 세월 속에서, 장개석의 통치를 뒤엎는 승리의 진군에서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 딸들이 중국인민과 공동투쟁을 했으며, 자기 생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중국혁명과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도와준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1958.11.22. 〈人民日報〉)
위의 〈인민일보〉 내용은 중국 현대사에 있어 험난했던 ‘네 개의 파고(波高)’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혁명과 해방을 위한 파고가 있을 때마다 북한이 중국을 ‘지원’(支援)했다는 것이다. 6∙25전쟁 이전 중국을 향한 ‘조선인민지원군’(朝鮮人民支援軍)인 셈이다. 첫째, ‘북벌’은 북방의 군벌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쑨원(孫文)이 전개한 내전이었는데, 신해혁명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아버지인 한국의 신규식을 포함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적극 가담한 것이다. 둘째, ‘대장정’시기 공산당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 군대와 계속 싸우면서 대행군을 했는데 이때 무정 등 조선인 수백 명 이상이 참여했다. 세 번째, ‘항일의 간고한 세월’은 항일투쟁시기 중국과 조선은 만주지역의 동북항일연군과 옌안지역에서의 조선의용군을 결성하여 중국 홍군을 도왔다. 마지막은 국공내전 시기 최소 6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중국혁명군과 함께 싸웠으며, 위기에 몰린 마오쩌둥은 네 번씩이나 김일성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때마다 김일성은 정권 수립 이전의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했다는 것이다.1)
이러한 역사적 관계와 ‘항미원조전쟁’을 통한 북∙중 관계를 우리는 흔히 ‘혈맹’이라고 부른다. 혈맹이란 공동의 적을 상대로 함께 피를 흘린 관계를 말한다. 일방이 아닌 함께 피를 흘린 관계, 즉 상호주의일 때 진정한 혈맹이 된다. 그렇다면 북한과 중국은 상호주의에 입각한 ‘혈맹’일까?
중국에서는 혈맹이라는 표현 대신 ‘선혈이 응고된’(鮮血凝成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어찌보면 ‘혈맹’이란 단어보다 훨씬 강렬한 표현이다. 북∙중 관계사에서 피를 ‘주고 받은’(give & take) 대표적 사례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북한이 중국을 위해 ‘뿌린’ 피는 위의 1958년 〈인민일보〉 기사내용이 대표적이다. 특히, 마지막 국공내전 시기 북한은 중공군을 돕기 위해 1947~1948년에 걸쳐서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는 북한 병사들을 만주에 파병하였고, 그 중에서 피를 흘린 숫자도 3만여 명으로 당시 주한 미군 고문단 정보문서는 추정한다. 그 이전인 1946년 여름부터 중공군이 만주에서 장개석의 국부군에 밀리고 있었을 때는 북한 땅을 중공군의 전략적 후퇴와 물자보급의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2)
한편, 2010년 통일부는 1945~1949년 북한이 중국 공산당 지원내역을 담은 북한 서적 『중국 동북해방전쟁을 도와』를 입수하였는데, 그 내용중에는 북한이 중공군에 무기 10만정과 탄약을 지원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 북한이 2016년 책 『중국 동북해방 전쟁을 도와』를 재발간했다. 북한 과학 백과사전출판사가 지난 2009년에 처음 발간한 책을 새로이 편집, 발간한 것이다. [출처:통일뉴스(http://www. tongilnews.com)]
중국이 북한을 위해 ‘뿌린’ 피는 6∙25전쟁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출병을 위한 여러 고려가 있긴 했지만 1945~1949년 시기 북한의 ‘북한인민지원군’과 물자, 그리고 후방기지 제공이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었을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북한과 중국은 분명 상호주의에 입각해 피를 나눈 ‘혈맹’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의 의견도 비등하다. 1961년 북한 김일성과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간 체결된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이 1992년 한∙중수교로 사실상 사문화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북∙미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경우 동맹 딜레마인 연루의 위협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 핵개발에 대한 중국의 외면과 대북제재 동참에 대해 북한은 “핵을 만드는데 가장 큰 적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적대감과 함께 “일본은 백년의 원수요, 중국은 천년의 원수다”라는 구호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북∙중 관계의 변화와 지속 양상은 향후 북∙중 관계를 조망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즉,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출발 당시 ‘혈맹’ 우호조약에서 점차 비대칭적 상호의존 과정을 거쳐 앞으로는 중∙미 관계의 변화양상에 따라 친소(親疏) 밀도가 조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외교노선은 철저하게 실사구시 방침하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가이익이 변수가 될 것이다.
▲ 1961년 북한 김일성과 중국의 저우언라이는 '조중 우호 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하였다. [사진:위키백과]
한∙미 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사이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중국의 6∙25 왜곡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공식적으로는 한∙미 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의 틀 속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동맹이 협력과 같을 수 없다는 결론이다. 강대국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의 입지를 견고히 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다고 줄타기 식의 전략적 모호성을 취하다보면 동맹국으로부터 포기의 위협은 물론, 동반자로부터 처절한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당연히 동맹이다. 특히, 안보∙군사분야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한∙미 동맹이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안미경중(安美經中 :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입장으로 전략적 모호성을 취하며, 국가이익을 극대화한다는 기존의 시도는 이제 통하지 않는 분위기다. 현재 상황에서 한국이 고민해야할 사항은 미국과 중국에 대한 양자택일이 아니다. 이미 미국을 선택한 상태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관리해 나가느냐의 문제이다.
1992년 한∙중수교 과정에서 양국은 이미 6∙25 전쟁에 관한 입장을 정리했다. 그렇기에 한∙중수교 공동성명 어디에도 6∙25 전쟁이나 한∙미 동맹, 북∙중 동맹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바로 ‘미래를 지향하며 노력하자’는 양측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은 중국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6∙25 전쟁을 이슈로 삼지 않았다. 그뿐인가. 우리는 6∙25 전쟁에서 희생당한 중공군의 유해를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6∙25 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약속을 어기고 있다. 중국이 역사를 왜곡한다면 우리는 중국에게 진상 규명을 요청하고 우리의 입장을 당당히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
▲ 북중 국경 부근의 단둥에 재개관한 ‘항미원조기념관’ 입구에 있는 마오쩌둥(毛澤東)과 펑더화이(彭德懷)의 동상. 펑더화이는 중국의 인민지원군 총 대장이었다. [사진:항미원조기념관 캡쳐]
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47285 (검색일자 2021. 6.23)
2) 백학순, “중국내전시 북한의 중국공산당을 위한 군사원조”, 《한국과 국제정치》 19권 1호(1994년), pp.263-265.
영원한 친구들 30주년 특별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중국의 ‘6∙25 공정’ : ‘항미원조’(抗美援朝), 과연 정의의 전쟁인가?
김 순 수
육군사관학교
정치학 교수
지난달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는 6∙25전쟁 명예훈장 수여식이 있었다. 한∙미 정상회담차 미국을 방문한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관한 한국전 영웅 퍼켓 예비역 대령의 명예훈장 수여식이 진행된 것이다.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서 6∙25전쟁시 중국군과 맞서 싸운 영웅에 대한 훈장 수여식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작년 중국에서도 ‘항미원조전쟁 참전 70주년’을 맞아 중국공산당 중앙과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등 세 곳의 명의로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 출신 노병들에게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 기념 훈장을 수여했다. 뿐만 아니라 금년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기념해 ‘7∙1 훈장’을 신설하고 6∙25 전쟁 당시 연합군 100여명을 사살해 중국과 북한에서 ‘영웅’ 대우를 받은 차이윈전(紫雲振) 등 3명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북∙중 동맹의 상징으로서 6∙25전쟁시 미군(유엔군)과 맞서 싸운 ‘영웅’들에 대한 훈장 수여였던 것이다.
중국은 최근 들어 6∙25전쟁에 대한 왜곡(소위 6∙25 공정)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난 4월 중국은 6∙25전쟁을 아예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왜곡 보도했다. 공산당 산하기관인 중국인권연구학회 보고서를 인용해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겼으며, 그들 대부분은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없다”고 기술했으며, 기존의 ‘항미원조’ 용어는 쏙 빼버렸다.
6∙25전쟁 발발 71주년에 즈음하여 중국의 6∙25전쟁에 대한 왜곡 실태와 의도, 그리고 북∙중 관계의 현주소를 조망해 보고자 한다.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을 지원(支援), 아니면 지원(志願)?
▲ 6·25전쟁시 항미원조·보가위국 선전물/패배를 모르던 미국에 첫 패배를 안겼다고 선전하는 게시물 사진 : 인민망(人民網)
중국의 6∙25전쟁 역사 왜곡 분위기가 최근 들어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의 중학교 국정(國定) 교과서와 국가공식 역사서를 보면 6∙25전쟁을 ‘항미원조전쟁’ 제하에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이 폭발했다”라는 내용으로 본문이 시작된다. 작년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 대회시 시진핑 주석 역시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이 폭발했다. 미국 정부는 세계 전략과 냉전 사유에서 출발해 조선 내전에 무장간섭을 결정하고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미래 중국을 이끌 ‘중국 공산당 꿈나무’인 중국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서도 6∙25전쟁을 내전으로 정의하고, 북한의 남침을 부인한데 이어 중국 외교부도 사실상 동조하고 있는 분위기다. 이처럼 중국 공산당과 교육기관의 공식적 역사왜곡에 더해 민간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개인 블로거와 1인 매체들도 가세하여 6∙25전쟁에 대한 중국 정부의 메시지를 보다 강력하고 집요하게 전파한다. 이러한 컨텐츠 상당수는 중화 우월주의, 인민해방군의 필승은 물론 미국에 절대 굴복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의 기습침략(남침)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한 결의한(제82호)에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미군 역시 유엔안보리 결의안(제83호)에 따라 결성된 유엔군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중국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비밀해제된 소련의 기록문서를 토대로 6∙25전쟁을 연구한 선즈화(沈志華) 중국교수 역시 “아시아 혁명의 책임자를 자처한 마오쩌둥(毛澤東)은 김일성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는 주장과 함께 북한 남침을 인정한다. 6∙25전쟁 당시 2만 6천여명을 파병하여 516명이 전사한 캐나다 조야(朝野)에서는 최근 중국의 이러한 왜곡을 두고 “6∙25전쟁 당시 중국의 역할을 찬양하는 것은 마치 1939년 독일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한 것을 기리는 것과 똑같다”고 분노한다.
이러한 중국의 왜곡을 반박할 수 있는 일례로 6∙25전쟁 참전시 중국군 부대명칭을 들 수 있다.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면서 부대명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결국 마오쩌둥은 ‘인민지원군’(人民志願軍)의 깃발아래 압록강을 넘도록 지시하였다. 만일 동북지역의 정규군인 인민해방군을 파병할 경우 중국 전역이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확전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지원’(支援, support)이 아닌 자발적으로 나서는 ‘지원’(志願, volunteer)의 명분으로 파병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6∙25전쟁을 내전으로 왜곡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두 ‘지원’ 중 어떤 ‘지원’을 해서도 안된다. 돕든 원하든 내전에 대한 개입이 되는 것이다. 더불어 중국이 의미를 두는 ‘항미원조전쟁’ 구호 역시 6∙25전쟁을 내전으로 전제할 경우 역사왜곡의 자충수가 된다. 원조(援朝)라면 북한에 대한 지원(支援)일테니. 참고로 베트남전에 대한 중국의 표현을 보면 중국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중국은 베트남전을 6∙25전쟁의 ‘항미원조’와 달리 ‘원월항미’(援越抗美)로 표현한다. 당시 중국을 제외한 사회주의권 국가에서 ‘항미원월’로 표현한데 반해 중국은 ‘항미’를 뒤에 위치시킴으로써 베트남전은 베트남 인민들이 주체적으로 싸워야 하며(인민전쟁), 중국은 보조적 역할에 머무르겠다는 의도를 내 보인 것이다.
‘항미원조전쟁’은 정의의 전쟁?
지금까지 6∙25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북침설과 유도설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북한의 남침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후 구소련의 6∙25전쟁 관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6∙25전쟁은 스탈린의 승인과 마오쩌둥의 지원 하에 김일성이 주도하여 일으킨 남침전쟁이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자 북한은 6∙25전쟁이 ‘정의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통상적인 기준에 따르면 ‘정의의 전쟁’은 정당한 원인과 의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북한은 6.25전쟁이 “조국해방전쟁인 동시에 국내외 반동세력을 반대하는 첨예한 계급투쟁이었으며, 인민민주주의 제도를 고수하기 위한 혁명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은 남한을 미국과 일본의 이중식민지로 보고,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이 불가피하며, 전쟁을 통해 미국을 남한에서 쫓아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민족해방전쟁론’을 제기하였다. 한마디로 6∙25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론’은 맑스∙레닌의 ‘계급전쟁 불가피론’과 마오쩌둥의 ‘인민전쟁론’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면 6∙25전쟁에 대한 중국의 인식은 어떠한가? 역사적으로 국공내전을 경험한 중국공산당은 북한의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맑스∙레닌의 ‘계급전쟁 불가피론’과 마오쩌둥의 ‘인민전쟁론’을 그대로 수용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발언을 인용해보면, 항미원조전쟁 60주년 기념 좌담회(당시 부주석)에서 “60년 전에 발생한 전쟁은 제국주의가 중국 인민에게 강요한 것이었으며, 영웅적인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 인민, 군대와 더불어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장비 등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언급했다. 10년후인 2020년 70주년 기념식에서 시진핑 주석은 “조선전쟁에 중국이 참전한 것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행동이며, 정의의 승리이자 평화의 승리, 인민의 승리”라고 언급하면서 “이를 통해 세계 평화와 인류의 진보에 큰 공헌을 했다”고 주장했다. 시진핑 역시 6∙25전쟁은 ‘정의의 전쟁’이었다는 주장이다.
북한과 중국 공히 6∙25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었으며, 민족해방과 세계평화를 위해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명백한 오류를 안고 있다. 첫째, 서구의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경제적 동기에 의한 계급전쟁은 불가피한가에 대한 비판이다.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정치적 이유로 평화공존이 가능하기에 전쟁이 유일한 계급갈등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6∙25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6∙25전쟁이 미국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남한의 민족주의 세력이 북한과 함께 미국의 지배와 맞서 싸운 정당한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미국이 6∙25전쟁에 부당하게 개입하여 민족해방에 실패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측과는 달리 남한내 동조반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무력도발에 맞서 싸웠다. 따라서 6∙25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 아니라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자유를 지켜낸 ‘자유수호전쟁’이었던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혈맹인가?
최근 중국의 ‘6∙25 공정’, 즉 역사왜곡을 정확히 진단하려면 북한에 대한 중국의 인식은 물론, 시진핑-김정은 시기 북∙중 관계를 이해해야만 한다. 북∙중 간의 역사적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사료를 제시한다.
“중국인민은 북벌(北伐)의 전화(戰火) 속에서, 장정(長征)의 길에서, 항일(抗日)의 간고한 세월 속에서, 장개석의 통치를 뒤엎는 승리의 진군에서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 딸들이 중국인민과 공동투쟁을 했으며, 자기 생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중국혁명과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도와준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1958.11.22. 〈人民日報〉)
위의 〈인민일보〉 내용은 중국 현대사에 있어 험난했던 ‘네 개의 파고(波高)’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혁명과 해방을 위한 파고가 있을 때마다 북한이 중국을 ‘지원’(支援)했다는 것이다. 6∙25전쟁 이전 중국을 향한 ‘조선인민지원군’(朝鮮人民支援軍)인 셈이다. 첫째, ‘북벌’은 북방의 군벌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쑨원(孫文)이 전개한 내전이었는데, 신해혁명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아버지인 한국의 신규식을 포함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적극 가담한 것이다. 둘째, ‘대장정’시기 공산당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 군대와 계속 싸우면서 대행군을 했는데 이때 무정 등 조선인 수백 명 이상이 참여했다. 세 번째, ‘항일의 간고한 세월’은 항일투쟁시기 중국과 조선은 만주지역의 동북항일연군과 옌안지역에서의 조선의용군을 결성하여 중국 홍군을 도왔다. 마지막은 국공내전 시기 최소 6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중국혁명군과 함께 싸웠으며, 위기에 몰린 마오쩌둥은 네 번씩이나 김일성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때마다 김일성은 정권 수립 이전의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했다는 것이다.1)
이러한 역사적 관계와 ‘항미원조전쟁’을 통한 북∙중 관계를 우리는 흔히 ‘혈맹’이라고 부른다. 혈맹이란 공동의 적을 상대로 함께 피를 흘린 관계를 말한다. 일방이 아닌 함께 피를 흘린 관계, 즉 상호주의일 때 진정한 혈맹이 된다. 그렇다면 북한과 중국은 상호주의에 입각한 ‘혈맹’일까?
중국에서는 혈맹이라는 표현 대신 ‘선혈이 응고된’(鮮血凝成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어찌보면 ‘혈맹’이란 단어보다 훨씬 강렬한 표현이다. 북∙중 관계사에서 피를 ‘주고 받은’(give & take) 대표적 사례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북한이 중국을 위해 ‘뿌린’ 피는 위의 1958년 〈인민일보〉 기사내용이 대표적이다. 특히, 마지막 국공내전 시기 북한은 중공군을 돕기 위해 1947~1948년에 걸쳐서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는 북한 병사들을 만주에 파병하였고, 그 중에서 피를 흘린 숫자도 3만여 명으로 당시 주한 미군 고문단 정보문서는 추정한다. 그 이전인 1946년 여름부터 중공군이 만주에서 장개석의 국부군에 밀리고 있었을 때는 북한 땅을 중공군의 전략적 후퇴와 물자보급의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2)
한편, 2010년 통일부는 1945~1949년 북한이 중국 공산당 지원내역을 담은 북한 서적 『중국 동북해방전쟁을 도와』를 입수하였는데, 그 내용중에는 북한이 중공군에 무기 10만정과 탄약을 지원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 북한이 2016년 책 『중국 동북해방 전쟁을 도와』를 재발간했다. 북한 과학 백과사전출판사가 지난 2009년에 처음 발간한 책을 새로이 편집, 발간한 것이다. [출처:통일뉴스(http://www. tongilnews.com)]
중국이 북한을 위해 ‘뿌린’ 피는 6∙25전쟁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출병을 위한 여러 고려가 있긴 했지만 1945~1949년 시기 북한의 ‘북한인민지원군’과 물자, 그리고 후방기지 제공이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었을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북한과 중국은 분명 상호주의에 입각해 피를 나눈 ‘혈맹’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의 의견도 비등하다. 1961년 북한 김일성과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간 체결된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이 1992년 한∙중수교로 사실상 사문화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북∙미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경우 동맹 딜레마인 연루의 위협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 핵개발에 대한 중국의 외면과 대북제재 동참에 대해 북한은 “핵을 만드는데 가장 큰 적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적대감과 함께 “일본은 백년의 원수요, 중국은 천년의 원수다”라는 구호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북∙중 관계의 변화와 지속 양상은 향후 북∙중 관계를 조망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즉,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출발 당시 ‘혈맹’ 우호조약에서 점차 비대칭적 상호의존 과정을 거쳐 앞으로는 중∙미 관계의 변화양상에 따라 친소(親疏) 밀도가 조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외교노선은 철저하게 실사구시 방침하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가이익이 변수가 될 것이다.
▲ 1961년 북한 김일성과 중국의 저우언라이는 '조중 우호 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하였다. [사진:위키백과]
한∙미 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사이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중국의 6∙25 왜곡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공식적으로는 한∙미 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의 틀 속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동맹이 협력과 같을 수 없다는 결론이다. 강대국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의 입지를 견고히 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다고 줄타기 식의 전략적 모호성을 취하다보면 동맹국으로부터 포기의 위협은 물론, 동반자로부터 처절한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당연히 동맹이다. 특히, 안보∙군사분야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한∙미 동맹이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안미경중(安美經中 :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입장으로 전략적 모호성을 취하며, 국가이익을 극대화한다는 기존의 시도는 이제 통하지 않는 분위기다. 현재 상황에서 한국이 고민해야할 사항은 미국과 중국에 대한 양자택일이 아니다. 이미 미국을 선택한 상태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관리해 나가느냐의 문제이다.
1992년 한∙중수교 과정에서 양국은 이미 6∙25 전쟁에 관한 입장을 정리했다. 그렇기에 한∙중수교 공동성명 어디에도 6∙25 전쟁이나 한∙미 동맹, 북∙중 동맹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바로 ‘미래를 지향하며 노력하자’는 양측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은 중국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6∙25 전쟁을 이슈로 삼지 않았다. 그뿐인가. 우리는 6∙25 전쟁에서 희생당한 중공군의 유해를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6∙25 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약속을 어기고 있다. 중국이 역사를 왜곡한다면 우리는 중국에게 진상 규명을 요청하고 우리의 입장을 당당히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
▲ 북중 국경 부근의 단둥에 재개관한 ‘항미원조기념관’ 입구에 있는 마오쩌둥(毛澤東)과 펑더화이(彭德懷)의 동상. 펑더화이는 중국의 인민지원군 총 대장이었다. [사진:항미원조기념관 캡쳐]
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47285 (검색일자 2021. 6.23)
2) 백학순, “중국내전시 북한의 중국공산당을 위한 군사원조”, 《한국과 국제정치》 19권 1호(1994년), pp.263-265.
영원한 친구들 30주년 특별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