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한미동맹, 리처드 S 위트컴 장군의 발자취”를 읽고 - 최동우

<독자 독후감>

“따뜻한 한미동맹, 리처드 S 위트컴 장군의 발자취”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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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우 (전 연합뉴스 상무, 본지 구독회원)

 

 

안녕하십니까. 한미우호협회가 발행하는 “영원한 친구들” 독자입니다.

 

귀 협회가 발행하고 있는 “영원한 친구들” 제259호(2021년 1~2월)에 실린 최상진 이사님의 글이 1953년 7월에 발생했었던 부산역 대 화재 사건과 부산 메리놀병원 건립 경위, 그리고 부산대학교 캠퍼스 부지 조성과 메인 건물 신축 경위 등을 밝혀주고, 회고하게 하여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또한 당시 피난 수도였던 부산에서 일어났던 큰 재난을 극복하는 데 커다란 힘을 심어주고, 부산대학교의 실질적인 산파 역할까지 해 주신 리처드 S 위트컴 장군님의 박애주의적인 헌신을 상기시켜 주어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최상진 이사님의 글은 바로 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시켜주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습니다. 저는 부산 출신으로 1942년생입니다. 1953년 당시에는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습니다. 제가 살았던 동네는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으로, 부산 본 역과는 다소 떨어져 있어 실제 고초를 당하지는 않았으나 엄청난 화재여서 부산이 불산이라 불리어지는 반갑지 않은 별명을 얻게 된 연유가 되었습니다.

 

저는 부산 개성중학교와 부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1961년 입학)를 졸업하고, 연합뉴스 상무로 퇴직한 전직 언론인입니다. 글월을 올리는 것은 최 이사님의 글이 저가 어렸을 때 겪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 주고, 또한 전란을 극복하게 하여 오늘날 선진국 문턱까지 올라서게 된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들어 준 우방 미국의 도움을 일깨워 주어서입니다.

 

제가 살았던 양정동은 부산역과 부산대학교가 있는 동래 온천장과는 중간지점쯤이나 오히려 동래 온천장과 더 가까운 곳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학생일 때에는 부산대학교가 없었습니다. 중등학교 때쯤인가 부산대학교의 온천장 캠퍼스가 조성되었지 않았는가 여겨집니다. 오늘날의 부산대학교가 제대로 된 캠퍼스를 갖게 된 것이 리처드 S 위트컴 장군의 명견천리 같은 혜안으로 이루어졌다니 감격스럽습니다.

 

제가 다닌 부산 개성중학교(서면 소재) 신축 교사도 아마도 6.25 후 부산 시내에서 최초로 건립된 신식 철근 시멘트 건물(3~4층?)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쯤 착공하여 3학년 가을께 준공되어 신축 교사에서는 공부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왜 말씀드리느냐 하면 이 신축 교사도 미군의 지원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송학준 교장 선생님(그 이후 서울 반포동 소재 세화여고 교장도 역임)은 해방 전 평양의 숭실전문대학 졸업생으로 영어 실력이 뛰어나 저가 중학생일 때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세계교육자대회에 중등학교 대표로 참석했었습니다.

 

1954년쯤인가에 건설된 부산 개성중학교 철근 콘크리트 교사도 송학준 교장 선생님이 아마도 위트컴 장군에게 교섭하여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중학교 때 내내 판잣집 가교사에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당시 최신식 철근 콘크리트 교사가 신축되었을 때 송학준 교장 선생님은 주례 조회 때마다 신축 교사 화장실이 수세식이므로 신문지 등 일반 종이를 변기에 넣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그때 수세식 화장실을 몰랐습니다.

 

위트컴 장군님의 발자취를 읽으니 50년대 초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위트컴 장군님은 한 마디로 군복을 입은 성인 같습니다. 선교사를 꿈꾸기도 했었다 하는 데 전장의 현장에서 몸소 실천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위트컴 장군님이 미국 캔자스주 주도 캔자스 시티 출신으로 토피카시에서 대학을 다니셨다 하니 더욱 친근감을 느낍니다.

 

벌써 70년도 더 지난 6.25 전쟁 전후를 회고해 보면 당시 한국은 정말 가난했었고, 희망도 없었던 암담한 나라이었습니다. 상당수가 점심을 못 먹던 형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만일 김 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몇 년간 가만히 남한을 내버려 더 두었다면 남한 내부에서 폭동 등 소요가 끝없이 일어나 스스로 무너져 김 일성의 손아귀로 저절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라고.

 

해방 당시 공업시설들은 거의가 북한 쪽에 있었고, 남한 쪽에는 조선방직( 부산 소재), 경성방직(군산), 경성 고무 등 경공업 시설 몇 군데가 입지해 있었을 뿐이었고, 자급자족할 식량마저도 크게 모자라 굶는 이가 상당수에 달했던 것이 당시 실정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번영은 6.25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이 베풀어 준 본격적인 지원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한미방위조약 체결로 국토 안보 방위는 물론 엄청난 경제원조를 퍼부어, 오늘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 국가들 가운데 한국이 미국의 지원으로 가장 성공한 대표적인 모범국가로 불리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은 현재 선진국 진입 문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국민소득이 G7국가인 이탈리아를 뛰어넘어 섰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한 제조업 강국 국가 순위로는 미국, 중국, 일본, 독일 다음으로 세계 5위 국가로 우뚝 올라 서 있지 않습니까?

 

한국의 비약적인 도약과 번영은 미국이 심어준 자유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토대로 경제발전을 추구했기 때문 아닙니까? 사회주의 체제를 추구한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발전과 성공을 이룬 국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북한을 보면 한 마디로 생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김정은 일가와 주위의 소수 권력자들을 위한 벙커(병영)에 불과합니다. 한 마디로 한국이 눈부신 경제발전을 성취하는 데에는 리처드 S 위트컴 장군님과 같은 수많은 미국의 의인들이 인도주의와 박애정신에 바탕을 두어 많은 경제원조에다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체제를 심어주었기 때문에 이룩되었다고 믿습니다.

 

6.25 당시 대한민국 제2의 도시였던 부산에 대학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고작 한반도 최대의 항구인 부산을 어업 기지로만 역할을 하게 하도록 일본은 수산학교(현재 부경대학교) 하나만을 세웠을 뿐이었습니다.


위트컴 장군님이 부산에 종합대학 설립을 내다보고, 당시 도심과는 상당한 거리인 동래 온천장 외곽에 대학교 부지를 선정하여, 대학교 본관 건물까지 건설토록 한 것은 놀라운 선견지명이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발전한 한국을 태동시키는 밑거름이었다 하여도 지나친 찬사는 아닙니다.

 

끝으로 최상진 이사님이 여러 차례에 걸친 현지답사와 자료조사 끝에 6.25 직후의 부산 실상들과 종합대학까지 갖게 되어 명실상부한 제2의 도시로서 위상을 갖추게 된 부산의 발전상을 밝혀주고, 이 같은 부산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신 위트컴 장군의 발자취에 관한 글을 쓰신 데 대해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위트컴 장군님은 당시 어려운 여건일 터인 데에도 고아들을 돌보던 한 묘숙 부인과 결혼까지 하면서까지 한국을 도우려 했었다는 사실도 밝혀주었습니다.

 

위트컴 장군에 대해서는 의인으로 살아 온 그의 생애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도 전기가 출판되기를 기대합니다. 전기 출판은 장군님의 일생을 만방에 알려, 이 세상이 남을 돕는 이타적 세상이 되어야만 더욱 좋은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역사적 사실을 일깨워 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고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헬조선이니 하면서 자신을 비하하거나, 불평을 일삼는 일부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불과 70년 전의 형편을 알리고, 교훈을 얻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강력히 추천해 드립니다. 오늘날의 한국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헬조선이라고 불평하지만 말고 감사함을 알고 힘써야 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라도 필요합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