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의 빛나는 주역, 에드워드 H 포니 대령 - 최상진

흥남철수의 빛나는 주역, 에드워드 H 포니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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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진 (수필가, 본 협회 이사/편집위원)

 


포니 대령, 포니 家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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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은 에드워드 H 포니(Edward H Forney, 이하 포니), 그는 1909년 8월 16일 1909년에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1931년 해군사관학교(US Naval Academy)를 졸업, 해병대 소위로 임관 후 태평양 전쟁에 투입되어 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군을 상대로 솔로몬 군도의 뉴조지아와 파푸아 뉴기니의 부겐빌 전투에서 치열한 정글 전투를 치렀다.

 

맥아더 극동 사령관의 휘하에서 수많은 상륙작전을 경험하고 팬타곤의 참모대학 과정을 이수하면서 그는 상이륙(上離陸) 작전 전문가로 이름을 쌓아나갔다. 한국전쟁 참여와 함께 기획한 포항 상륙작전은 1950년 7월 18일 낙동강 방어선이 설치될 무렵 최후의 보루인 부산수호를 위해 1만 명 이상의 병력과 2천 대의 차량을 투입하는 첫 행정 상륙작전으로 용의주도한 사전준비가 필요했다. 적이 미처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당시 동아시아지역 미 해군 사령관 ‘터널 조이’ 미 해군 제독은 제1기병사단의 병력증강이 적시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부산 방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 평했다.

 

그는 곧바로 맥아더의 지시로 인천상륙작전 주 설계자 그룹에 투입되었다. 그는 이미 미 해병대에서 가장 지식이 풍부한 수륙양면 작전 전문가였으며 흥남 철수 직전에는 제10군단 알몬드 장군(이하 알몬드)의 휘하에서 차석보좌관 겸 철수지휘단 책임관으로 활약하였다. 그가 기획한 흥남 철수는 군사 전략적, 인류 인간애적 측면에서 전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사실이 되었고 한국 정부는 청동 무공훈장을 미군은 공로 훈장 수여와 준장승진으로 보답한다. 그는 보훈처가 선정한 2018년 12월의 6.25 전쟁영웅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다. 한국을 떠난 뒤 베트남전쟁에 참여하였다가 지병인 폐암으로 1965년 1월 21일, 50대의 젊은 나이로 고인이 되었다. 생전의 포니는 자신을 잘 표현하지 않았는지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 편이다. 영웅의 행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일까? 포니는 4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다. 아들 W Forney는 해병 장교로 베트남에서 근무하였고 손자 Ned Forney도 해병 장교로 임관해 노르웨이 주재 NATO 일원으로 근무하다 제대한 3대를 잇는 해병 가족이며 증손자 Ben Forney는 아산 연구소에 근무한바 있는 지한파 가문으로 한국전쟁의 참상, 흥남 철수의 배경인 전쟁과 사랑, 한미동맹의 고귀함을 책으로 엮어 널리 알리고 있다.

 

귀신 잡는 해병의 아버지, ‘포니路’로 보은하다

 

지금부터 11년 전, 1910년 11월 4일 경상북도 포항에 있는 해병대 제1 사단에서는 “포니 路” 명명식이 있었다. 이름도 생소하고 군부대의 통행 길에 외국 장군의 이름은 붙이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어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해병대가 ‘We always remember you, Forney’라고 한 그의 행적은 그때부터 서서히 세간에 알려지고 영화 ‘국제시장’의 흥행과 함께 세계사적 휴먼스토리 흥남 철수, 살인적 한파 속에서 치러진 장진호 전투 등이 재조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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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니 대령은 휴전 후 1957년부터 3년간 한국 해병대 수석 군사 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해병대의 중요성을 당시 한미(韓美) 군 당국에 역설하였고 전략 기동부대로서의 한국 해병대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해병대의 전략 전술 개발과 장비확충 및 인재 양성에 전념한 그는 당시 포항에 있는 미 해병대 제3 항공사단 대지를 한국 해병대 제1사단이 물려받도록 주선하여 해병대 정신과 전략의 맥을 이어가도록 했다. 이에 보답하는 정성으로 포항 해병대 제1사단은 ‘흥남철수작전 기념사업회’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온 포니의 유족들인 그의 아들 에드워드 포니(Edward W. Forney)와 부인 유본 포니(Yvonne M. Forney) 그리고 증손자 벤 포니(Ben E. Forney)에게 부대 안에 ‘포니 로(Forney 路)’를 지정하여 헌정하였고 포니 대령은 외국 군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우리나라 군 기지 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로를 가진 인물로 남게 됐다.

 

장진호 전투의 해병 정신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으로 서울을 수복(9월 28일)한 유엔군은 10월 1일 3.8선을 넘어 힘찬 북진을 거듭, 불과 한 달 사이에 평양을 탈환(10월 20일)하였다. 전세 호전에 도취된 맥아더 사령부는 서부전선에 미 8군을 진격시키고 동부전선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제10군단(알몬드 중장)으로 하여금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시킨 뒤 합동으로 크리스마스까지 한만국경선까지 돌파하여 전쟁을 끝낸다는 구상으로 전선을 독촉했다.

 

장진호 전투의 선봉은 스미스(Smith) 소장이 이끄는 미 제1해병사단이었고 바(Bar) 소장의 육군 7사단은 압록강 최상류인 혜산진 공격을 명받았다. 이에 대적한 중국은 쑹스룬(1899~1991)의 제9병단으로 7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병 1사단은 2차대전에서도 활약한 최정예부대였다. 별명은 사냥개 ‘도베르만’이었다. 지휘관 스미스 소장도 유럽과 태평양 전장을 누빈 백 전 용사였다. 반면 중국군의 쑹스룬은  40대의 젊은 장군으로 황포군관학교를 나왔고 17살 때부터 산전수전 공중전을 치른 유격의 神, 기습의 명수였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그가 적용한 전술은 팽덕회의 口袋戰法(구대전법; 일명 八字戰法)을 이용한 전술이었다. –후퇴하는 척 적을 깊숙이 유인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겹겹이 포위해 섬멸하는 전술

 

장진호와 흥남을 잇는 126km 길이의 도로로 특히 하갈우리까지는 해발 1,000m가 넘는 외길이었고 이 길을 따라 곳곳에 매복한 중국군의 공격을 받으며 철수하는 해병대는 완전히 노출된 상태에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더욱이 1950년 11월 말은 시베리아 한랭전선이 장진호를 뒤덮고 있어 기온이 영하 37도까지 내려갔다. 장진호 전투의 두 개의 적으로 하나는 실제의 적 중국군이었고 또 다른 적은 극심한 추위였다. 동상 자가 속출하고 얼어붙은 무기는 오작동이 다반사였으며 모르핀은 얼어서 사용할 수 없었다. 12월 4일 북경방송은 “미 해병 제1사단의 전멸은 시간문제이다.”라고 방송했고 그다음 날 미 해병 제5연대장 레이먼드 머레이(Raymond Murry) 중령의 소수의 장병 앞에서 역사적 훈시를 한다. "내일 새벽 우리는 이곳에서 반대 방향으로 공격한다. 우리는 낙오병이 아니라 해병으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다."

 

 전 세계 어떤 군대보다 전투의지가 강하고 용맹하다는 자부심과 “Samper Fidelis(라틴어), Always Faithful or Always loyal” 이란 충성·단결심을 가진 미 해병대에게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낙동강 전투에서도 인천상륙작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그들에게 후퇴, 패배 등의 용어는 헛되지 않았다. 위기에 처한 사단장 스미스 소장의 대처는 침착하고 지혜로웠다. 그는 상부의 공격 독촉에도 전시 동향을 주시하며 하갈우리에 도착하자마자 며칠에 걸쳐 얼어붙은 땅에 불도저로 간이 활주로를 먼저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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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는 전쟁에서 한 사람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찾아서 데려온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간이 비행장은 전멸의 공포 속에서도 지원병을 공급받고 부상자와 사망자를 후송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 총 17일간의 장진호 사투에서 미 제1사단은 4,418명의 사상자와 7,313명의 비전투 부상자를(대부분 동상 환자였음) 반면 중공군은 2만 5천 명의 전사자와 1만2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해병 제1사단을 괴멸시키겠다는 중국의 의도와는 달리 수적으로 참패를 당한 중국 제9병단은 재편성을 위해 후방에 잔류하게 되었다.

 

미국의 “뉴스위크”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했고 미군의 전사에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후퇴 작전을 통해 해병 1사단은 열 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그들의 포위를 뚫고 장진호에서 흥남에 도착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미 해병대는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었다.

 

흥남 철수와 포니 대령의 보이지 않는 손

 

뒤로는 중국군이 밀고 들어오고 그나마 의지하던 유엔군과 국군이 철수하는 상황에서 피난민들의 선택은 창망한 바다에 뛰어들던지 중국 공산군에게 능욕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12월 8일 원산이 중국군에 점령되어 육상 퇴각로는 봉쇄되었다. 


인천상륙작전과는 달리 향후  전투를 위한 작전상의 후퇴가 불가피했고 10만의 연합군과 무기를 일단 안전하게 철수시키기 위해 흥남항을 통한 해상철수를 결정했다. 원산이 막히던 날 흥남 철수 명령이 하달되었고 고속항모 4척, 경항모 6척, 호위 항모 2척에 화력지원으로 중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로켓함 3척 등 200여 척이 동원되어 인천상륙작전의 261척과 유사한 규모의 철수 전단이 형성되었지만, 민간인 철수를 위한 계획은 고려되지 않았다.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 흥남철수작전 기념비에는 6명의 공동 주역들이 등장한다. - 맥아더 장군, 알몬드 10군단장, 포니 대령, 현봉학 박사, 김백일 장군, 박시창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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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봉학은 결정권자 알몬드 소장의 고문으로 통역과 민사업무를 담당한 미국 버지니아대학 출신의 의학박사였고 고향은 함흥인 반면, 알몬드의 고향은 버지니아였고 그의 10군단의 사령부는 함흥에 있었다. 서로가 팔짱을 낀 듯한 관계가 되어 친밀감과 신뢰로 상대를 존중했다. 포니는 알몬드의 참모장으로 두 사람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갈우리의 300여 주민들이 미 해병 제1사단 후퇴와 함께 피난길에 들어섰다. 흥남에 다가갈수록 피난민은 늘어났고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나 중공군이 끼어들어 스파이 역할도 하고 야음을 틈타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피난민의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들, 미군들에게 협조했던 주민들, 그리고 집이 불타서 장진호 주변에 살 수 없던 사람들, 평소 공산주의자들의 압정에 염증을 느끼고 자유를 염원했던 사람들이었다. 현봉학의 고향인 함흥에서는 5만의 피난민이 가세하여 철수 시기에는 20만 명 이상이 모여들었다. 1차로 현봉학의 간청과 포니의 뜨거운 가슴이 작동했다.

 

수차의 면담과 요청으로 알몬드는 여분의 공간에 4천 명의 승선을 허락한다. 여기에서 승선 통제감독관인 포니의 의지가 작용 되어 무기와 전략 물자를 폐기하면서까지 피난민을 싣게 한다. 12월 19일부터 피난민 철수에 할당된 선박은 총 12척, 출발 이후의 걱정을 할 틈도 없이 콩나물시루같이 피난민이 적재(?)되었다. 


마지막 수송선 ’매러디스 빅토리‘호, 7,600톤의 중소형급으로 항공유를 운반하는 선박으로 정원 60명 중 선원이 47명으로 13명의 여분밖에 없었다. 선장 레너드 라우는 12월 23일 포니와 협의하여 25만톤의 군수 물자를 내리고 230배에 달하는 1만4천 명의 피난민을 승선시킨다.

 

다음날 출항한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25일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거제 장승포항에 무사 입항하였는데 운항 중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탄생해 크리스마스 기적의 배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 레너드 라우 선장은 매러디스의 기적이 하느님의 뜻에 따른 영험의 깨달음으로 4년 후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하여 마리너스 수사가 된다. 


이렇게 군병력 105,000명, 차량 17,500대, 전쟁물자 350,000톤, 피난민 98,100명에 달하는 흥남철수 작전은 대단원의 막이 내렸고, 에드워드 포니 대령은 포항, 인천, 원산 상륙작전과 흥남철수작전까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거사를 치르고 전사에 길이 남을 휴먼드라마를 완성시켰다.

 

died for a good reason!

 

네드 포니(에드워드 H 포니의 친손자)는 2018년도 한국 방문기간 중 인터뷰에서 6.25 참전용사 유가족의 일원으로 그가 본 현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단상을 표현했다. “첫째, 일부 청년 세대들은 6.25 전쟁이나 흥남철수작전 등 한국의 현대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그들의 선조들이 지켜온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는 채 오로지 취업과 경제문제에 대해서만 고민하며 살아간다. 둘째, 학생들이 6.25 전쟁이 북한의 의도된 남침인 것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6.25 전쟁은 우발적인 전쟁이 아니라 모택동과 스탈린, 김일성의 사전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일으킨 명백한 침략전쟁이다. 청년 세대들의 올바른 역사적 인식이 필요한 것 같다. 셋째, 참전용사들의 가족은 그들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에 감사한다(died for a good reason). 그들의 희생 덕분으로 지금의 한국과 북한은 굉장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네드 포니는 2살 때 오늘의 주인공 에드워드 포니 할아버지를 잃었다. 그가 할아버지를 잘 몰랐듯이 대한민국과 6.25 한국전쟁도 잘 몰랐을 것이다. 현봉학 박사의 살아생전 주선으로 그는 자랑스러운 조상의 넋을 기리고 한미동맹의 기치 아래 한국과 미국의 우호를 새롭게 다진다. 오히려 한국 젊은이들의 역사관을 걱정하고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퇴조를 걱정한다. 


미국인들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Thank you for your service’라고 경의를 표한다. 전쟁상황에서 버려질 뻔한 10만 명의 인명을 구하고 그 업적을 되새기는 에드워드 포니 준장과 그 가문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