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으로 보내는 ‘자유의 목소리’
방형남 편집위원장
“이민복 씨는 요즘 투지가 샘솟는 기분이다. 대북(對北) 풍선단장으로 통하는 그는 4일 경기 연천에서 북한을 향해 전단(삐라)을 날렸다. 언론에도, 정부에도 알리지 않았다. 하루 뒤 북한이 항의 통지문을 청와대 국가안보실 앞으로 보내왔다. 전단이 북한 지역에 떨어졌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북녘 동포에게 진실을 알리는 전단이야말로 북한을 변하게 할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이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다.”
필자가 2014년 3월 17일 자 동아일보에 쓴 칼럼의 일부다. 10년이 지난 지금 남북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풍선이 갈등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현재 남북갈등의 근본 원인은 핵과 미사일을 고도화하면서 무력 협박을 가중하고 있는 북한이다. 폐기된 9, 19 합의만 해도 북한이 먼저 무효화 했는데 뒤늦은 남한의 폐기가 손가락질받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를 겨누는 북한의 수많은 핵과 미사일은 못 본 체하면서 오물 풍선에 경련을 일으키는 자세로는 저들을 제압할 수 없다. 북한 스스로 말하지 않았는가. 전단을 보내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고.
군부 독재 시절 우리는 언론통제의 장벽을 넘어 도착한 외국 언론의 시국 관련 보도와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등 국제인권단체의 격려 서신을 보고 힘을 얻어 민주화의 꿈을 키웠다. 3대 세습을 하면서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정보통제를 하는 독재정권의 희생자들인 북녘 동포에게 진실을 전하는 일은 군사정권 시절 남한 국민에게 전해진 자유의 목소리만큼 의미가 크다.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같은 동족인 북녘 동포들이 인간다운 삶과 보편적인 자유를 누리도록 지원해야 하지 않는가. 분단 70년이 넘도록 한반도의 북쪽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 작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북한에서 남한 삐라를 본 것을 계기로 탈북해 민간인 최초로 대북 풍선 날리기를 시작한 이민복 씨의 기고를 통해 북한 자유화를 위한 분투의 여정을 짚어본다. 그는 개인의 후원을 모아 어렵게 어렵게 북한으로 ‘진실의 폭탄’을 날리고 있다. |
대북 전단 왜 보내야 하는가?
이 민 복 (사)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 풍선단장, 前 북한과학원 연구원
지난 6월 29일 경기 북부 지역에서 대북 전단(삐라)을 북한으로 날렸다. 길이 14m, 둘레 4m 크기의 초대형을 비롯한 비닐 풍선 여러 개에 50만 장의 전단을 넣어 하늘로 올려 보냈다. 내가 갖고 있는 장비로는 한 번에 최대 480만 장의 삐라를 북한으로 보낼 수 있다. 마침 남서풍이 강하게 불어 전단이 주로 북강원도에 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손바닥 크기의 비닐 전단은 ‘내가 깨달은 6·25(조국해방전쟁) 전범자, 해방자, 남조선 실태’ 라는 제목의 일반용과 ‘내가 만나본 선교사와 종교(기독교)’ 라는 선교용의 2가지였다. 일반용 전단에는 북한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는 6·25를 남한이 아닌 김일성이 일으켰다는 역사적 사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북한 동포들에게 자신들이 거짓 선전에 속았음을 일깨우게 할 ‘진실의 폭탄’이다.
수소 가스를 채운 풍선은 최대 5천m까지 상승한다. 내가 날리는 풍선은 다단계로 작동하는 첨단 제품이다. 휴전선을 넘어갈 무렵 단거리 타이머가 작동하면 1차로 전단이 투하되고, 사리원 부근에서 2차 투하가 이뤄진다. 풍선이 평양을 지날 때 쯤 나머지 전단이 쏟아진다. 최대 10시간이 지나 작동하는 타이머를 장착하면 북한 최북단까지 전단을 날려 보낼 수 있다. 풍속에 따라 적절한 타이머를 장착하면 된다. 나는 전단을 날릴 때 언론에 알리는 등 법석을 떨지 않고 조용히 한다. 그래야 북한의 즉각적인 반발이 없고, 지역 주민들의 불필요한 불안도 예방할 수 있다. 공개적으로 전단을 날리며 쇼를 하는 단체들로 인해 남북관계가 과도하게 경색되는 게 안타깝다.
나는 북한에서 남한이 보낸 전단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탈북한 사람이다. 북한은 나라 자체가 거대한 감옥이다. 보통 주민들은 외부 소식을 접할 수 없다. 통행증이 없으면 어디로 갈 수도 없다. 나 역시 이런 암흑 속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암흑을 뚫고 들어온 외부의 빛을 보게 됐다. 1990년 8월 군사분계선 근처인 강원도 철원군 대전리에서 처음으로 남한 삐라를 본 것이다. 작은 빛이라도 암흑이 짙으면 짙을수록 더욱 빛난다. 보면 처벌한다고 엄포를 놓지만, 그로 인해 더 궁금하고 보고 싶어지는 게 인간의 심리다. 북한 주민은 외부 소식, 특히 남한 소식을 알고 싶어 한다. 일단 전단을 본 사람은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믿을 만한 이들에게 전하게 된다. 극도로 폐쇄된 북한에선 구전(口傳) 문화가 극도로 발달했다. 그러기에 돈이 넉넉하지 못해 전단을 북한에 많이 못 보낸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많이 못 보내도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 는 구전 효과를 믿기 때문이다.
폐쇄 속에서 자란 나 역시 외부 소식 특히 남조선 소식이 너무 궁금했다. 처음으로 남한 삐라의 존재를 알게 된 뒤 출장 기간을 연기하고 샅샅이 주변을 뒤져 삐라를 찾았다. 대부분 북한 실정과 정서를 모르고 보낸 내용들이 들어있었지만 ‘인생 혁명’을 일으킬 만한 것이 있었다. 6·25 전범자가 누구인가 하는 엄청난 진실을 파헤치도록 자극을 준 것이다. 북한 정권은 전쟁을 일으켜 놓고 피해자에게 뒤집어씌웠다. 민족사 최대비극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려놓고 증오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6·25 전범자가 김일성이라 주장하는 남한 삐라를 보고 콧방귀를 뀌며 믿지 않았다. 그러다 어떤 계기가 생길 때마다 이상한 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수령님(김일성)이 천재적 군사 전략가라고 해도 서울을 3일 만에 점령한 것에 의문이 생겼다. 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서 세계전사에 없는 기적인데 과연 그게 맞을까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됐다. 그러던 중 아주 쉽게 진실을 아는 방법을 찾아냈다. 연구원(북한과학원) 습성이어서인지 경험주의적인 방법을 찾은 것이다. 6·25 초기 참전자와 38선 주변 주민에게 조용히 진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주위에 참전자가 수두룩했다. 나의 연구소 관할 화부 아버지가 6·25 초기 참전자여서 술과 담배를 들고 가 만났다. 영웅이라고 추어주며 취한 기운에 속심을 말하게 유도하였다. 이분은 조선족 출신 팔로군이었다. 6·25 직전 중공 팔로군에서 조선족만 차출하여 이동시켰다. 단둥을 거쳐 신의주로 넘어갈 때야 조선에 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기차로 원산에 도착하니 소련군 고문이 나타나 군기를 잡고 나서 속초와 강릉 전선에 배치했다. 그곳은 당시 북한 땅이었으며 백골부대라는 국군과 맞서게 됐다. 중국 해남도까지 가서 장개석 군대를 쳐부순 백전노장들이지만 긴장했다고 한다. 싸움을 하면 죽을 각오를 한 자들이 가장 무서운데 백골이 되도록 싸우겠다니. 그런데 정작 6월 25일 새벽 4시 대포를 쏘며 쳐들어가니 남한군은 팬티 바람으로 죽거나 도망치더란다. 이 대목에서 나는 속으로 “아차! 우리가 먼저 쳤구나”라고 외쳤다. 이후 38선 근처에 살던 주민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국군은 “아침은 해주, 점심은 평양”이라고 허풍을 떨다가 인민군 탱크에 밀려 나갔다는 것이다.
또 하나 검증한 것이 있다. 6·25 전쟁 때 미군이 양민을 가장 많이 잔인하게 죽였다는 신천 사건이다. 신천에는 군인과 인민들이 필수적으로 견학해야 하는 박물관이 있다. 여자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머리에 못을 박는 등의 미군 만행에 온 군민이 치를 떨며 미제를 증오하게 만드는 곳이다. 신천에서 시집온 아주머니에게 쌀을 선물로 드리며 조용히 말을 시켜보았다. 신천은 주 전선이 아니어서 미국 놈 코빼기도 못 보았다고 했다. 대학살은 좌우익 동족끼리 벌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러 차례 확인해 전범자와 학살의 원인을 확실히 알게 됐다. 그러자 두 가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욕이 나왔다. 우선 김일성의 사기행각과 전범 행위에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내가 욕하고 내가 놀랄 정도였다. 우상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대신 반발심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두 번째 욕은 남조선 당국을 향해 한 것이다. 6·25 전쟁에 대해서는 초기 참전자들에게 물어보라는 주장만 계속 보냈어도 북한 사람들이 속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남한 삐라를 보고 나서 3개월 뒤인 1990년 11월 19일 탈북했다. 중국에서 붙잡혀 북송된 뒤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때 겪은 고초를 적을 여유가 없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우여곡절 끝에 4개 국가의 국경과 감옥을 거쳐 남한에 도착한 것은 1995년 2월이었다.탈북자가 남한에 오면 조사를 받는다. 신원을 확인하는 한편 북한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기 위해서다. 나도 168개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 첫 순서가 대북 전단의 효과였다. 폐쇄와 거짓이 특징인 북한에 진실을 넣을 수 있는 핵보다 강력한 수단이자 효과라고 말했다. 사명감을 다하겠으니 대북 전단 부서에서 6개월만 일하게 해 달라고 했다. 99% 되었다고 하더니 나머지 1% 때문에 무산되었다. 남한은 사명보다 밥벌이가 우선이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세상이 내 맘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사명에 충실하며 살기로 했다. 북한농업과학원 연구원 출신이니 안정된 정부 연구원으로 일하라는 요청을 여러 번 받았지만, 하늘의 뜻은 사명으로 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답답한 남한 정부의 행실이 나타난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북 전단과 방송을 중단한 것이다. 김정일 정권의 요구대로 중단한 것은 명백한 전략적 오판이다. 남한 전단을 보고 탈북한 당사자로서 통탄할 일이었다. 그래서 대북 풍선 도전에 나섰다. 관군이 부실하면 의병이 나섰던 한반도 역사처럼 말이다. 2003년부터 탈북자로 그리고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대북 풍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대북 풍선 날리기의 원조가 된 것이다. 당시 탈북자 김성민 씨는 인터넷 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기술이 없어 어린이용 고무풍선을 사용했다. 삐라 한 장 달랑 달아 날렸지만 대부분 멀리 못 가서 터져 버렸다. 각고의 노력 끝에 2005년 대형 비닐 풍선을 개발했다. 300만 원짜리 풍선을 10만 원 대로 낮추는 연구가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이다. 필자는 대북 풍선에 관한 특허를 보유한 유일한 인물이다. 물에 젖어도 손상되지 않는 비닐 전단도 필자의 작품이다. 고압과 가연성 가스(수소)를 다루기 때문에 대북 전단을 날리려면 가스 안전 자격증이 있어야 하고 사용하는 차량도 국가인증을 받아야 한다. 많은 탈북자 단체 가운데 필자만이 적법 자격을 갖추고 대북 풍선 날리기를 하고 있다.
풍선을 날리려면 돈이 많이 든다. 풍선 한 개 날리는데 10만 원 정도 드는데 많으면 한 번에 160개를 보내니 비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비용은 내가 부담했지만 이후 개인의 소액 후원으로 어렵게 대북 풍선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풍선 사업의 첫 후원자는 한미우호협회를 창설한 김상철 전 서울시장이었다. 김 변호사와는 1998년부터 인연을 맺었다. 그가 주도한 유엔의 탈북자 보호를 청원하는 1천만 명 서명 운동에 김성민 씨와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김 변호사는 2003년 전단 날리기를 시작한 나를 격려하면서 매달 30만 원을 후원했다. 첫 후원자였다. 나중에는 100만원 씩 후원금을 보내주셨다. 고인이 되셨지만 “북한이 철조망으로 땅을 막아도 하늘은 못 막는다” 라던 그분의 격려와 지원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처음 대북 풍선을 날릴 때는 접경지대 주민들이 모두 나와 신기한 듯 구경을 했다. 어떤 분들은 장소를 제공하거나 즉석에서 후원금을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8년 자유북한운동연합이 공개적으로 풍선을 날리면서 주민들이 적대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풍선 날리기가 공개 행사가 되자 북한이 생사 결단의 위협으로 대응했고, 험악한 북한의 위협에 접경지역 주민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같은 탈북자 입장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풍선 날리는 비법을 전수한 게 화근이 되고 말았다.
결국 북한에 굴복한 좌파 정부가 대북전단금지법을 만들어 지난 8년 간 전단을 날리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남북 관계가 요동치면서 또다시 전단이 갈등의 전면에 등장했다. 핵과 미사일 개발을 강행하면서 무력 협박을 일삼는 북한이 갈등의 원천인데 엉뚱하게 전단이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물론 공개적인 풍선 날리기가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지만 북한의 오물 풍선 공세는 남한의 내부 분열을 노리는 비열한 술책일 뿐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하면서도 북한에서 까지 들고 나온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조용히 대북 풍선을 보내도록 정부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 군이 과거에 그토록 많은 전단을 북으로 보낼 때도 북한 정권은 침묵하지 않았던가.
강조하건데 대북 풍선은 북한 동포의 눈과 귀를 열어주는 원초적인 인도주의 인권 운동이다. 평화통일의 지름길은 북한 동포를 깨우치는 길밖에 없다고 고(故) 황장엽 노동당 비서도 단언했다. 대북 풍선은 조용하게, 북한이 진실과 정보의 기아(飢餓)에서 벗어날 될 때까지 보내져야 한다.
북한으로 보내는 ‘자유의 목소리’
방형남 편집위원장
“이민복 씨는 요즘 투지가 샘솟는 기분이다. 대북(對北) 풍선단장으로 통하는 그는 4일 경기 연천에서 북한을 향해 전단(삐라)을 날렸다. 언론에도, 정부에도 알리지 않았다. 하루 뒤 북한이 항의 통지문을 청와대 국가안보실 앞으로 보내왔다. 전단이 북한 지역에 떨어졌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북녘 동포에게 진실을 알리는 전단이야말로 북한을 변하게 할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이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다.”
필자가 2014년 3월 17일 자 동아일보에 쓴 칼럼의 일부다. 10년이 지난 지금 남북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풍선이 갈등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현재 남북갈등의 근본 원인은 핵과 미사일을 고도화하면서 무력 협박을 가중하고 있는 북한이다. 폐기된 9, 19 합의만 해도 북한이 먼저 무효화 했는데 뒤늦은 남한의 폐기가 손가락질받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를 겨누는 북한의 수많은 핵과 미사일은 못 본 체하면서 오물 풍선에 경련을 일으키는 자세로는 저들을 제압할 수 없다. 북한 스스로 말하지 않았는가. 전단을 보내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고.
군부 독재 시절 우리는 언론통제의 장벽을 넘어 도착한 외국 언론의 시국 관련 보도와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등 국제인권단체의 격려 서신을 보고 힘을 얻어 민주화의 꿈을 키웠다. 3대 세습을 하면서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정보통제를 하는 독재정권의 희생자들인 북녘 동포에게 진실을 전하는 일은 군사정권 시절 남한 국민에게 전해진 자유의 목소리만큼 의미가 크다.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같은 동족인 북녘 동포들이 인간다운 삶과 보편적인 자유를 누리도록 지원해야 하지 않는가. 분단 70년이 넘도록 한반도의 북쪽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 작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북한에서 남한 삐라를 본 것을 계기로 탈북해 민간인 최초로 대북 풍선 날리기를 시작한 이민복 씨의 기고를 통해 북한 자유화를 위한 분투의 여정을 짚어본다. 그는 개인의 후원을 모아 어렵게 어렵게 북한으로 ‘진실의 폭탄’을 날리고 있다.
대북 전단 왜 보내야 하는가?
이 민 복 (사)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 풍선단장, 前 북한과학원 연구원
지난 6월 29일 경기 북부 지역에서 대북 전단(삐라)을 북한으로 날렸다. 길이 14m, 둘레 4m 크기의 초대형을 비롯한 비닐 풍선 여러 개에 50만 장의 전단을 넣어 하늘로 올려 보냈다. 내가 갖고 있는 장비로는 한 번에 최대 480만 장의 삐라를 북한으로 보낼 수 있다. 마침 남서풍이 강하게 불어 전단이 주로 북강원도에 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손바닥 크기의 비닐 전단은 ‘내가 깨달은 6·25(조국해방전쟁) 전범자, 해방자, 남조선 실태’ 라는 제목의 일반용과 ‘내가 만나본 선교사와 종교(기독교)’ 라는 선교용의 2가지였다. 일반용 전단에는 북한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는 6·25를 남한이 아닌 김일성이 일으켰다는 역사적 사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북한 동포들에게 자신들이 거짓 선전에 속았음을 일깨우게 할 ‘진실의 폭탄’이다.
수소 가스를 채운 풍선은 최대 5천m까지 상승한다. 내가 날리는 풍선은 다단계로 작동하는 첨단 제품이다. 휴전선을 넘어갈 무렵 단거리 타이머가 작동하면 1차로 전단이 투하되고, 사리원 부근에서 2차 투하가 이뤄진다. 풍선이 평양을 지날 때 쯤 나머지 전단이 쏟아진다. 최대 10시간이 지나 작동하는 타이머를 장착하면 북한 최북단까지 전단을 날려 보낼 수 있다. 풍속에 따라 적절한 타이머를 장착하면 된다. 나는 전단을 날릴 때 언론에 알리는 등 법석을 떨지 않고 조용히 한다. 그래야 북한의 즉각적인 반발이 없고, 지역 주민들의 불필요한 불안도 예방할 수 있다. 공개적으로 전단을 날리며 쇼를 하는 단체들로 인해 남북관계가 과도하게 경색되는 게 안타깝다.
나는 북한에서 남한이 보낸 전단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탈북한 사람이다. 북한은 나라 자체가 거대한 감옥이다. 보통 주민들은 외부 소식을 접할 수 없다. 통행증이 없으면 어디로 갈 수도 없다. 나 역시 이런 암흑 속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암흑을 뚫고 들어온 외부의 빛을 보게 됐다. 1990년 8월 군사분계선 근처인 강원도 철원군 대전리에서 처음으로 남한 삐라를 본 것이다. 작은 빛이라도 암흑이 짙으면 짙을수록 더욱 빛난다. 보면 처벌한다고 엄포를 놓지만, 그로 인해 더 궁금하고 보고 싶어지는 게 인간의 심리다. 북한 주민은 외부 소식, 특히 남한 소식을 알고 싶어 한다. 일단 전단을 본 사람은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믿을 만한 이들에게 전하게 된다. 극도로 폐쇄된 북한에선 구전(口傳) 문화가 극도로 발달했다. 그러기에 돈이 넉넉하지 못해 전단을 북한에 많이 못 보낸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많이 못 보내도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 는 구전 효과를 믿기 때문이다.
폐쇄 속에서 자란 나 역시 외부 소식 특히 남조선 소식이 너무 궁금했다. 처음으로 남한 삐라의 존재를 알게 된 뒤 출장 기간을 연기하고 샅샅이 주변을 뒤져 삐라를 찾았다. 대부분 북한 실정과 정서를 모르고 보낸 내용들이 들어있었지만 ‘인생 혁명’을 일으킬 만한 것이 있었다. 6·25 전범자가 누구인가 하는 엄청난 진실을 파헤치도록 자극을 준 것이다. 북한 정권은 전쟁을 일으켜 놓고 피해자에게 뒤집어씌웠다. 민족사 최대비극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려놓고 증오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6·25 전범자가 김일성이라 주장하는 남한 삐라를 보고 콧방귀를 뀌며 믿지 않았다. 그러다 어떤 계기가 생길 때마다 이상한 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수령님(김일성)이 천재적 군사 전략가라고 해도 서울을 3일 만에 점령한 것에 의문이 생겼다. 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서 세계전사에 없는 기적인데 과연 그게 맞을까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됐다. 그러던 중 아주 쉽게 진실을 아는 방법을 찾아냈다. 연구원(북한과학원) 습성이어서인지 경험주의적인 방법을 찾은 것이다. 6·25 초기 참전자와 38선 주변 주민에게 조용히 진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주위에 참전자가 수두룩했다. 나의 연구소 관할 화부 아버지가 6·25 초기 참전자여서 술과 담배를 들고 가 만났다. 영웅이라고 추어주며 취한 기운에 속심을 말하게 유도하였다. 이분은 조선족 출신 팔로군이었다. 6·25 직전 중공 팔로군에서 조선족만 차출하여 이동시켰다. 단둥을 거쳐 신의주로 넘어갈 때야 조선에 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기차로 원산에 도착하니 소련군 고문이 나타나 군기를 잡고 나서 속초와 강릉 전선에 배치했다. 그곳은 당시 북한 땅이었으며 백골부대라는 국군과 맞서게 됐다. 중국 해남도까지 가서 장개석 군대를 쳐부순 백전노장들이지만 긴장했다고 한다. 싸움을 하면 죽을 각오를 한 자들이 가장 무서운데 백골이 되도록 싸우겠다니. 그런데 정작 6월 25일 새벽 4시 대포를 쏘며 쳐들어가니 남한군은 팬티 바람으로 죽거나 도망치더란다. 이 대목에서 나는 속으로 “아차! 우리가 먼저 쳤구나”라고 외쳤다. 이후 38선 근처에 살던 주민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국군은 “아침은 해주, 점심은 평양”이라고 허풍을 떨다가 인민군 탱크에 밀려 나갔다는 것이다.
또 하나 검증한 것이 있다. 6·25 전쟁 때 미군이 양민을 가장 많이 잔인하게 죽였다는 신천 사건이다. 신천에는 군인과 인민들이 필수적으로 견학해야 하는 박물관이 있다. 여자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머리에 못을 박는 등의 미군 만행에 온 군민이 치를 떨며 미제를 증오하게 만드는 곳이다. 신천에서 시집온 아주머니에게 쌀을 선물로 드리며 조용히 말을 시켜보았다. 신천은 주 전선이 아니어서 미국 놈 코빼기도 못 보았다고 했다. 대학살은 좌우익 동족끼리 벌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러 차례 확인해 전범자와 학살의 원인을 확실히 알게 됐다. 그러자 두 가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욕이 나왔다. 우선 김일성의 사기행각과 전범 행위에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내가 욕하고 내가 놀랄 정도였다. 우상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대신 반발심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두 번째 욕은 남조선 당국을 향해 한 것이다. 6·25 전쟁에 대해서는 초기 참전자들에게 물어보라는 주장만 계속 보냈어도 북한 사람들이 속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남한 삐라를 보고 나서 3개월 뒤인 1990년 11월 19일 탈북했다. 중국에서 붙잡혀 북송된 뒤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때 겪은 고초를 적을 여유가 없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우여곡절 끝에 4개 국가의 국경과 감옥을 거쳐 남한에 도착한 것은 1995년 2월이었다.탈북자가 남한에 오면 조사를 받는다. 신원을 확인하는 한편 북한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기 위해서다. 나도 168개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 첫 순서가 대북 전단의 효과였다. 폐쇄와 거짓이 특징인 북한에 진실을 넣을 수 있는 핵보다 강력한 수단이자 효과라고 말했다. 사명감을 다하겠으니 대북 전단 부서에서 6개월만 일하게 해 달라고 했다. 99% 되었다고 하더니 나머지 1% 때문에 무산되었다. 남한은 사명보다 밥벌이가 우선이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세상이 내 맘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사명에 충실하며 살기로 했다. 북한농업과학원 연구원 출신이니 안정된 정부 연구원으로 일하라는 요청을 여러 번 받았지만, 하늘의 뜻은 사명으로 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답답한 남한 정부의 행실이 나타난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북 전단과 방송을 중단한 것이다. 김정일 정권의 요구대로 중단한 것은 명백한 전략적 오판이다. 남한 전단을 보고 탈북한 당사자로서 통탄할 일이었다. 그래서 대북 풍선 도전에 나섰다. 관군이 부실하면 의병이 나섰던 한반도 역사처럼 말이다. 2003년부터 탈북자로 그리고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대북 풍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대북 풍선 날리기의 원조가 된 것이다. 당시 탈북자 김성민 씨는 인터넷 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기술이 없어 어린이용 고무풍선을 사용했다. 삐라 한 장 달랑 달아 날렸지만 대부분 멀리 못 가서 터져 버렸다. 각고의 노력 끝에 2005년 대형 비닐 풍선을 개발했다. 300만 원짜리 풍선을 10만 원 대로 낮추는 연구가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이다. 필자는 대북 풍선에 관한 특허를 보유한 유일한 인물이다. 물에 젖어도 손상되지 않는 비닐 전단도 필자의 작품이다. 고압과 가연성 가스(수소)를 다루기 때문에 대북 전단을 날리려면 가스 안전 자격증이 있어야 하고 사용하는 차량도 국가인증을 받아야 한다. 많은 탈북자 단체 가운데 필자만이 적법 자격을 갖추고 대북 풍선 날리기를 하고 있다.
풍선을 날리려면 돈이 많이 든다. 풍선 한 개 날리는데 10만 원 정도 드는데 많으면 한 번에 160개를 보내니 비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비용은 내가 부담했지만 이후 개인의 소액 후원으로 어렵게 대북 풍선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풍선 사업의 첫 후원자는 한미우호협회를 창설한 김상철 전 서울시장이었다. 김 변호사와는 1998년부터 인연을 맺었다. 그가 주도한 유엔의 탈북자 보호를 청원하는 1천만 명 서명 운동에 김성민 씨와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김 변호사는 2003년 전단 날리기를 시작한 나를 격려하면서 매달 30만 원을 후원했다. 첫 후원자였다. 나중에는 100만원 씩 후원금을 보내주셨다. 고인이 되셨지만 “북한이 철조망으로 땅을 막아도 하늘은 못 막는다” 라던 그분의 격려와 지원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처음 대북 풍선을 날릴 때는 접경지대 주민들이 모두 나와 신기한 듯 구경을 했다. 어떤 분들은 장소를 제공하거나 즉석에서 후원금을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8년 자유북한운동연합이 공개적으로 풍선을 날리면서 주민들이 적대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풍선 날리기가 공개 행사가 되자 북한이 생사 결단의 위협으로 대응했고, 험악한 북한의 위협에 접경지역 주민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같은 탈북자 입장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풍선 날리는 비법을 전수한 게 화근이 되고 말았다.
결국 북한에 굴복한 좌파 정부가 대북전단금지법을 만들어 지난 8년 간 전단을 날리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남북 관계가 요동치면서 또다시 전단이 갈등의 전면에 등장했다. 핵과 미사일 개발을 강행하면서 무력 협박을 일삼는 북한이 갈등의 원천인데 엉뚱하게 전단이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물론 공개적인 풍선 날리기가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지만 북한의 오물 풍선 공세는 남한의 내부 분열을 노리는 비열한 술책일 뿐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하면서도 북한에서 까지 들고 나온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조용히 대북 풍선을 보내도록 정부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 군이 과거에 그토록 많은 전단을 북으로 보낼 때도 북한 정권은 침묵하지 않았던가.
강조하건데 대북 풍선은 북한 동포의 눈과 귀를 열어주는 원초적인 인도주의 인권 운동이다. 평화통일의 지름길은 북한 동포를 깨우치는 길밖에 없다고 고(故) 황장엽 노동당 비서도 단언했다. 대북 풍선은 조용하게, 북한이 진실과 정보의 기아(飢餓)에서 벗어날 될 때까지 보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