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시리즈-한미동맹을 지켜온 사람들❷]
미국인의 선한 영향력을 보여준 언더우드 박사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인문여행작가)
한국과 미국이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정식 교류를 시작한 때는 1882년 고종 19년이었다. 이 조약에 의해 이듬해인 1883년 초대 미국 전권 공사가 인천에 도착하였고 조선 정부에서도 민영익(閔泳翊)을 전권 대사로 임명하여 미국으로 보냈다. 이후 조선에 관심을 갖고 변화를 추구한 미국인들이 속속 태평양을 건너왔는데 이들 중에는 개신교 선교사가 특히 많았다. 그들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교육을 펼침으로써 개신교의 선교를 도모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든 당시 조선에 건너온 많은 선교사가 우리 민족 근대화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또 오늘날까지 10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한국과 미국이 우호적 관계를 이어오는 데 제대로 된 첫 단추를 끼워준 것도 그들이었다. 그 선교사 중 대표적인 인물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년 7월 19일~1916년 10월 12일) 박사이다.
젊은 시절 목사가 된 언더우드는 1년 동안 인도에서 힌디어와 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낯선 나라에 보낼 선교사를 구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조선에 갈 것을 결심했다. 그가 조선에 올 때만 해도 가톨릭을 비롯한 서양의 종교는 완전히 자유롭게 보장되지 않았다. 먼저 전파되었던 가톨릭도 숱한 박해를 받고 수많은 교인이 순교하며 교세 확장이 주춤하고 있었다. 개신교에서 볼 때 당시 조선은 선교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은 여전히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청년 언더우드는 약혼녀에게 조선에 함께 가자고 제의했다.
“그곳에서는 무얼 먹고 사나요?”
“모르겠소.”
“병원은 있나요?”
“모르겠소.”
“그럼 당신이 조선에 대해 아는 게 뭔가요?”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그곳에 하나님을 모르는 1,000만의 민중이 살고 있다는 것뿐이오.”
약혼녀는 동행할 것을 거부하며 파혼을 통보했다. 파혼 통보도 언더우드의 조선행을 막지 못했다. 그에게는 자신이 선교하고 밝은 길로 이끌어야 할 1,000만 조선인을 만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언더우드 박사가 조선으로 향하던 1884년, 조선에서는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한동안 외국인 입국이 제한되었고 언더우드 박사는 몇 달 간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데 그 기간이 허송세월만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조선어도 조금 배운 덕분에 언더우드 박사는 조선 사람들과 보다 친근하게 만날 수 있었다.
1885년 언더우드 박사는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이듬해 3월 개교한 조선 최초의 서양 의학 교육 기관인 제중원 의학교에서 의예과 과정인 수학, 물리, 화학 등을 가르쳤다. 물론 선교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몇 년 후 같은 선교사이자 제중원의 여의사인 릴리어스 스털링 호튼(Lillias Stirling Horton, 1851~1921)과 결혼했는데, 이들은 신혼여행으로 평안도 지역 선교 여행을 택했다. 1,600킬로미터를 거의 도보로 이동하는 고된 여행이었다.
언더우드 박사는 단순히 선교를 떠나 서양과 조선 문화 사이의 교류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일본에 머물 때부터 시작한 신약성경의 4대 복음서 번역을 마쳤고 한영사전, 한불사전, 한영 문법책을 펴냈다. 그가 조선 교육에 바친 열정과 헌신은 다른 어떤 외국인이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고 지대했다. 1885년에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서울 정동에 조선 최초의 고아원인 언더우드학당(경신학당)을 만들었고, 이 경신학당을 모태로 하여 1915년에는 고등교육기관인 경신학교 대학부를 설립했다. 경신학교 대학부는 1917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라고 불리게 되었다.
지금의 이름 연세대학교는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학교가 합해진 것이다. 세브란스라는 이름은 록펠러의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던 루이 헨리 세브란스(Louis Henry Severance, 1838~1918)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1900년 병원 건립에 써달라며 거액의 돈을 제중원에 기부했다. 이 기금으로 제중원이 새로 지어졌고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 세브란스 의학교가 된 것이다. 세브란스의 기부금이 오롯이 병원과 의학교 건립에 쓰인 데는 언더우드 박사의 활약이 컸다.
고종과 언더우드 박사와의 특별한 관계도 많이 알려져 있다. 1895년 을미사변 후 고종은 독살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때 고종의 신변을 보호한 것은 서양 선교사들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고종이 안전하게 먹을 수 있도록 통조림을 제공했고 밤에는 그의 곁에서 불침번을 섰다. 그때 언더우드 박사는 육혈포(六穴砲, 권총)로 무장하고 밤동안 고종의 신변을 지켰다고 한다.
후에 고종은 언더우드 박사에게 원두우(元杜尤)라는 조선식 이름을 지어주고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劍)’까지 하사했다. 사인참사검의 ‘인(寅)’ 자는 호랑이를 나타내는 한자이다. 이 칼의 이름에는 호랑이의 정기를 가득 담은,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사악함을 베는 칼’이란 뜻이 담겨 있다.
언더우드 박사는 미국 선교사 중에서도 조선의 독립과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고 평가된다. 그래서일까, 그가 세운 새문안교회는 독립운동가를 여럿 배출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등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규식은 언더우드 박사의 양자였고 새문안교회 장로를 지냈다. 안창호는 언더우드 박사가 세운 구세학당(경신고등학교 전신)에서 공부한 새문안교회 교인이었다. 이렇게 언더우드 박사는 조선의 청년 교육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한일합방 전 해인 1909년 9월 16일, 종로 YMCA회관에서 그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전한 격려와 당부는 지금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제군들이 확고부발(確固不拔)의 정신을 갖고 신앙을 키워나가면 그 결과 언젠가 반드시 큰 성과를 낼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라는 바는 제군들이 한층 용기를 떨쳐 우리 교회를 성대하게 하는 것, 내가 믿고 사랑하는 곳 한국이 순연한 독립국이라는 것을 늘 유의하고 결코 한 시도 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후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청년들을 독려하고 용기를 주었던 언더우드 박사는 친일 성향의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고 일본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다.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아래로부터의 선교 방식을 지향했고 누구보다 청렴결백했으며 자신의 집을 고아원, 교회로 기꺼이 제공하기도 했던 언더우드 박사. 그는 라디오 방송으로 “참고 견딘다면 해방의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조선인에게 용기를 주는 연설도 했다. 당시에는 그런 연설 자체로 커다란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것은 물론이다.
언더우드 박사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와 후손들까지 우리나라와 계속적인 교류를 하며 많은 공헌을 해왔다. 친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는 1917년 연희전문학교에 거액을 기부하여 신촌 캠퍼스가 만들어지는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 후손 대부분은 한국식 이름을 갖고 있고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언더우드 박사의 아들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박사는 3‧1운동 당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외신에 알린 장본인이다. 연희전문학교장을 지낸 그는 자신이 미국 국적자임을 활용하여 최현배, 정인보 등 한국어 학자들을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결국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연희전문학교는 큰 피해를 입었고 원한경 박사는 태평양 전쟁 직전에 미국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 그는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교장 자리를 지켰지만 6‧25전쟁 때 부산에서 구호 사업을 돕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손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는 6‧25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했고 정전협정 현장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한남대학교와 배재대학교의 설립에 힘썼던 그도 한국에서 생애를 마쳤다. 언더우드 박사의 증손자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Horton Underwood Jr. 한국명 원한광)는 연세대 영어영문학과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언더우드 박사의 건강을 해친 것은 과중한 업무로 인한 과로였다. 계속되는 선교와 번역 작업 등 때문에 몸이 상한 그는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자 1916년 4월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10월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한국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위치한 경신고등학교 운동장에는 ‘원두우’라는 이름이 새겨진 언더우드 박사의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는 다음과 같이 글귀가 새겨져 있다.
“1885년에 25세의 나이로 내한한 미국 선교사로서 이 땅에 최초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교육 기관을 설립하시니 경신학교가 이에서 비롯되었도다. …… 오늘 맥맥히 이어온 설립 정신을 기리며 그의 슬기롭고 고귀한 모습을 가까이 하기 위해 여기 박사의 상을 세우노라.”
언더우드라는 이름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한반도에 첫발을 내딛던 ‘25세’라는 나이가 새삼 가슴을 울린다. 어리디어린 청년이 낯선 땅에 홀로 와 위험을 무릅쓰고 수많은 업적을 이뤄냈고 미국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우리 민족에게 전해줬다. 그리고 그 실천이 후손으로까지 이어지며 한국과 언더우드 가문, 한국과 미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시켜왔다. 그 아름다운 인연의 시작점인 언더우드 박사. 그는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그가 한반도에 남긴 수많은 업적과 정신은 우리 곁 곳곳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연중시리즈-한미동맹을 지켜온 사람들❷]
미국인의 선한 영향력을 보여준 언더우드 박사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인문여행작가)
한국과 미국이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정식 교류를 시작한 때는 1882년 고종 19년이었다. 이 조약에 의해 이듬해인 1883년 초대 미국 전권 공사가 인천에 도착하였고 조선 정부에서도 민영익(閔泳翊)을 전권 대사로 임명하여 미국으로 보냈다. 이후 조선에 관심을 갖고 변화를 추구한 미국인들이 속속 태평양을 건너왔는데 이들 중에는 개신교 선교사가 특히 많았다. 그들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교육을 펼침으로써 개신교의 선교를 도모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든 당시 조선에 건너온 많은 선교사가 우리 민족 근대화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또 오늘날까지 10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한국과 미국이 우호적 관계를 이어오는 데 제대로 된 첫 단추를 끼워준 것도 그들이었다. 그 선교사 중 대표적인 인물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년 7월 19일~1916년 10월 12일) 박사이다.
젊은 시절 목사가 된 언더우드는 1년 동안 인도에서 힌디어와 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낯선 나라에 보낼 선교사를 구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조선에 갈 것을 결심했다. 그가 조선에 올 때만 해도 가톨릭을 비롯한 서양의 종교는 완전히 자유롭게 보장되지 않았다. 먼저 전파되었던 가톨릭도 숱한 박해를 받고 수많은 교인이 순교하며 교세 확장이 주춤하고 있었다. 개신교에서 볼 때 당시 조선은 선교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은 여전히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청년 언더우드는 약혼녀에게 조선에 함께 가자고 제의했다.
“그곳에서는 무얼 먹고 사나요?”
“모르겠소.”
“병원은 있나요?”
“모르겠소.”
“그럼 당신이 조선에 대해 아는 게 뭔가요?”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그곳에 하나님을 모르는 1,000만의 민중이 살고 있다는 것뿐이오.”
약혼녀는 동행할 것을 거부하며 파혼을 통보했다. 파혼 통보도 언더우드의 조선행을 막지 못했다. 그에게는 자신이 선교하고 밝은 길로 이끌어야 할 1,000만 조선인을 만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언더우드 박사가 조선으로 향하던 1884년, 조선에서는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한동안 외국인 입국이 제한되었고 언더우드 박사는 몇 달 간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데 그 기간이 허송세월만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조선어도 조금 배운 덕분에 언더우드 박사는 조선 사람들과 보다 친근하게 만날 수 있었다.
1885년 언더우드 박사는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이듬해 3월 개교한 조선 최초의 서양 의학 교육 기관인 제중원 의학교에서 의예과 과정인 수학, 물리, 화학 등을 가르쳤다. 물론 선교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몇 년 후 같은 선교사이자 제중원의 여의사인 릴리어스 스털링 호튼(Lillias Stirling Horton, 1851~1921)과 결혼했는데, 이들은 신혼여행으로 평안도 지역 선교 여행을 택했다. 1,600킬로미터를 거의 도보로 이동하는 고된 여행이었다.
언더우드 박사는 단순히 선교를 떠나 서양과 조선 문화 사이의 교류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일본에 머물 때부터 시작한 신약성경의 4대 복음서 번역을 마쳤고 한영사전, 한불사전, 한영 문법책을 펴냈다. 그가 조선 교육에 바친 열정과 헌신은 다른 어떤 외국인이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고 지대했다. 1885년에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서울 정동에 조선 최초의 고아원인 언더우드학당(경신학당)을 만들었고, 이 경신학당을 모태로 하여 1915년에는 고등교육기관인 경신학교 대학부를 설립했다. 경신학교 대학부는 1917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라고 불리게 되었다.
지금의 이름 연세대학교는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학교가 합해진 것이다. 세브란스라는 이름은 록펠러의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던 루이 헨리 세브란스(Louis Henry Severance, 1838~1918)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1900년 병원 건립에 써달라며 거액의 돈을 제중원에 기부했다. 이 기금으로 제중원이 새로 지어졌고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 세브란스 의학교가 된 것이다. 세브란스의 기부금이 오롯이 병원과 의학교 건립에 쓰인 데는 언더우드 박사의 활약이 컸다.
고종과 언더우드 박사와의 특별한 관계도 많이 알려져 있다. 1895년 을미사변 후 고종은 독살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때 고종의 신변을 보호한 것은 서양 선교사들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고종이 안전하게 먹을 수 있도록 통조림을 제공했고 밤에는 그의 곁에서 불침번을 섰다. 그때 언더우드 박사는 육혈포(六穴砲, 권총)로 무장하고 밤동안 고종의 신변을 지켰다고 한다.
후에 고종은 언더우드 박사에게 원두우(元杜尤)라는 조선식 이름을 지어주고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劍)’까지 하사했다. 사인참사검의 ‘인(寅)’ 자는 호랑이를 나타내는 한자이다. 이 칼의 이름에는 호랑이의 정기를 가득 담은,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사악함을 베는 칼’이란 뜻이 담겨 있다.
언더우드 박사는 미국 선교사 중에서도 조선의 독립과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고 평가된다. 그래서일까, 그가 세운 새문안교회는 독립운동가를 여럿 배출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등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규식은 언더우드 박사의 양자였고 새문안교회 장로를 지냈다. 안창호는 언더우드 박사가 세운 구세학당(경신고등학교 전신)에서 공부한 새문안교회 교인이었다. 이렇게 언더우드 박사는 조선의 청년 교육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한일합방 전 해인 1909년 9월 16일, 종로 YMCA회관에서 그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전한 격려와 당부는 지금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제군들이 확고부발(確固不拔)의 정신을 갖고 신앙을 키워나가면 그 결과 언젠가 반드시 큰 성과를 낼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라는 바는 제군들이 한층 용기를 떨쳐 우리 교회를 성대하게 하는 것, 내가 믿고 사랑하는 곳 한국이 순연한 독립국이라는 것을 늘 유의하고 결코 한 시도 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후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청년들을 독려하고 용기를 주었던 언더우드 박사는 친일 성향의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고 일본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다.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아래로부터의 선교 방식을 지향했고 누구보다 청렴결백했으며 자신의 집을 고아원, 교회로 기꺼이 제공하기도 했던 언더우드 박사. 그는 라디오 방송으로 “참고 견딘다면 해방의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조선인에게 용기를 주는 연설도 했다. 당시에는 그런 연설 자체로 커다란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것은 물론이다.
언더우드 박사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와 후손들까지 우리나라와 계속적인 교류를 하며 많은 공헌을 해왔다. 친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는 1917년 연희전문학교에 거액을 기부하여 신촌 캠퍼스가 만들어지는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 후손 대부분은 한국식 이름을 갖고 있고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언더우드 박사의 아들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박사는 3‧1운동 당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외신에 알린 장본인이다. 연희전문학교장을 지낸 그는 자신이 미국 국적자임을 활용하여 최현배, 정인보 등 한국어 학자들을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결국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연희전문학교는 큰 피해를 입었고 원한경 박사는 태평양 전쟁 직전에 미국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 그는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교장 자리를 지켰지만 6‧25전쟁 때 부산에서 구호 사업을 돕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손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는 6‧25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했고 정전협정 현장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한남대학교와 배재대학교의 설립에 힘썼던 그도 한국에서 생애를 마쳤다. 언더우드 박사의 증손자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Horton Underwood Jr. 한국명 원한광)는 연세대 영어영문학과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언더우드 박사의 건강을 해친 것은 과중한 업무로 인한 과로였다. 계속되는 선교와 번역 작업 등 때문에 몸이 상한 그는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자 1916년 4월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10월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한국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위치한 경신고등학교 운동장에는 ‘원두우’라는 이름이 새겨진 언더우드 박사의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는 다음과 같이 글귀가 새겨져 있다.
“1885년에 25세의 나이로 내한한 미국 선교사로서 이 땅에 최초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교육 기관을 설립하시니 경신학교가 이에서 비롯되었도다. …… 오늘 맥맥히 이어온 설립 정신을 기리며 그의 슬기롭고 고귀한 모습을 가까이 하기 위해 여기 박사의 상을 세우노라.”
언더우드라는 이름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한반도에 첫발을 내딛던 ‘25세’라는 나이가 새삼 가슴을 울린다. 어리디어린 청년이 낯선 땅에 홀로 와 위험을 무릅쓰고 수많은 업적을 이뤄냈고 미국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우리 민족에게 전해줬다. 그리고 그 실천이 후손으로까지 이어지며 한국과 언더우드 가문, 한국과 미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시켜왔다. 그 아름다운 인연의 시작점인 언더우드 박사. 그는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그가 한반도에 남긴 수많은 업적과 정신은 우리 곁 곳곳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