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특별기고❷]경제안보 시대의 통상외교정책 방향 - 현오석 전 경제부총리

특별기고❷


경제안보 시대의 통상외교정책 방향


현오석 전 경제부총리 / 협회 고문


  미국의 저명한 국제경제학자인 찰스 킨들버거 교수의 역작 <경제 강대국 흥망사>는 국가의 생로병사를 다루고 있다. 언뜻 보면 영속할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국가는 늙고 병들고 소멸한다. 특히 먹고사는 문제인 경제와 죽고 사는 문제인 안보가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된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 시대를 맞아, 국가들의 생로병사 주기가 예전보다 한층 짧아질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든다.

  국제정치의 관점에서 경제-안보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은 경제가 안보에 귀속된다는 것으로, 국가안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경제적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국가안보에 있어 경제적 역량은 상대국의 권력을 약화 또는 강화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써 국가의 권력(power)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며, 기존의 군사안보에 주로 집중되었던 국가안보의 영역은 점차 경제 영역을 비롯하여 식량, 환경, 사회적 요인 등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냉전체제가 종식된 1950년대 이후 경제-안보 관계는 자유주의적 논의가 주도하면서 세계화의 확산과 함께 상품·자본·사람의 이동과 교류에 대한 제한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국제경제질서가 형성되었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적 접근방식에 기반한 경제안보의 개념은 국가의 경제적 역량은 해당 국가가 군사적 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며,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위협적인 상대국 또는 적국이 될 수 있으며, 국제관계에서의 전쟁과 갈등은 경제발전 및 경제통합에 의해 위험이 감소될 수 있다는 것으로 ‘안보’보다는 ‘경제’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1990년대 이후 경제안보는 여전히 자유주의적 접근방식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국가경제의 범주에 산업기반 및 인프라의 영역을 포괄하면서 국가는 국방산업기반(defense industrial base)의 구축을 통해 현대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냉전 초기의 인식이 조금씩 부활하게 되었다. 특히 산업발전이 앞서 있는 선진국의 경우, 비록 새로운 국제경제질서하에서 군사적 위협은 감소하였더라도 경제적 취약성에 대한 우려는 더욱 증대되었다는 측면에서 ‘경제안보의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세계화와 함께 글로벌 공급망의 확대를 통해 국가간 상호의존성과 초연결성이 증대되면서 경제와 안보의 연계형태가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그동안 세계화 흐름 속에서 세계경제 성장을 견인한 글로벌 공급망은 이제 상호의존성의 ‘무기화’(weaponization)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경제적 효율성의 원천이었던 국가간 경제적 상호의존은, 이제 역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수단이 된 셈이다. 이에 따라 거대한 시장을 확보하고 있는 주요국들은 자국의 시장 또는 자원을 활용한 경제적 압박 수단을 통해 경쟁국의 경제적 부상을 저지하거나 더 나아가 국내정책과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치며 자국의 경쟁력 제고 및 패권 유지를 추구하고 있다. 특히 경제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국제경제질서 하에서 특정국들이 다자무역체제의 혜택 속에서 불공정한 무역관행을 통해 경제적 부상을 이루며 패권국의 경제적 지위를 위협하는 상황이 초래되면서, 기존의 경제적 효율성보다는 국가안보 이익의 중요성이 더욱 주목을 받게 되고 ‘경제를 위한 안보(security for economy)’가 아닌 ‘안보를 위한경제(economy for security)’에 더 방점을 두는 경제안보의 개념으로 변화하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오늘날 세계 각국은 시장의 효율보다 가치에 기반한 신뢰와 안정성을 중시하는 대외정책을 취하고 있다. 미국은 경쟁국 중국의 부상으로 패권적 지위를 위협받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경제적 통치술(economic statecraft)로써 기존의 수입규제 및 수출통제 등의 통상정책 수단 뿐 아니라 투자규제조치를 비롯하여 공급망 재편과 산업육성정책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경제안보정책을 추진중이다. 특히 미중 갈등은 경제를 넘어 안보와 이념으로 확대되고, 분야도 단순한 무역에서 기술변화와 통화에 이르기 까지 전방위적이다. 이웃 일본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FOIP)’ 대외정책을 통해 자국의 경제안보를 위한 국제협력과 지지기반을 확보하려 애쓰고 있다. 중국 또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신청한 데 이어, 최근에는 글로벌개발구상과 글로벌안보구상을 발표하면서 역내에 경제적 관여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호주, 영국, EU도 각자의 전략과 정책을 발전시켜 다각적인 협력과 연대를 추진중이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경제·안보의 균형 있는 연계를 보장하는 다자무역체제가 작동하지 않을 경우 국가 간 경쟁적인 산업정책의 추진과 국내산업 보호 정책 등에 따라 ‘바닥으로의 경쟁(race to the bottom)’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이를 막기 이해서는 국제환경의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긴요하다. 특히 경제안보의 중요성을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은 기존 무역규범의 방치는 다자무역체제의 무의미성(irrelevance)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와의 충돌을 초래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진영 간 또는 선진국·개도국간 블록화 또는 파편화를 야기할 수 있다. 한편,경제안보의 중요성은 첨단기술 관련 산업 뿐 아니라 원자재 등 천연자원, 식량, 환경 관련 산업도 해당되는 광범위한 이슈이므로 선진국 뿐 아니라 개도국의 이해관계도 모두 반영된 균형적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주요국 대외정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상황에서 우리의 외교정책 기조도 경제안보 관점에서 재편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공급망 리스크에 대한 대책으로 경제안보 강화를 위한 공급원의 다변화 등 보편적인 접근방식과 함께 아시아 지역 공급망 강화등 우리의 상황에 맞는 특수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미국의 공급망 재편 정책은 동맹국 및 우방국과의 공조를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중국의 추격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우리 산업과 기업에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보조금 규제를 약화시키는 추세도, 미래 산업육성을 목표로 보조금 정책이 필요한 우리 처지에서는 꼭 불리한것만은 아니다. 또한 현재 미국 주도로 타진되고 있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는 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새로운 경제 블록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며, 미국은 IPEF를 통해 디지털, 환경, 노동 분야를 포괄하는 새로운 무역규범을 수립하려 할 것이다.

  시장규모가 크지 않고 무역의존도가 경제적 자립도에 비해 매우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경제안보’에 기반한 통상외교정책의 방향은 비차별적인 자유무역주의의 기본원칙이 훼손되지 않는 방향으로 국제무역체제를 정립하는 것이 기본 방향이지만, 다자무역체제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있는 현 상황에서의 차선책은 우리에게 실효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역 차원의 무역체제 및 협력의제를 중심으로 협력할 뿐 아니라 주도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제경제질서의 현황을 고려할 때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IPEF와 같은 새로운 소다자적 형태의 무역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는 그동안 규범 수립을 주도하는 국가(rule-maker)가 아니었으나 우리도 디지털 경제 및 인프라·공급망 분야 등에서의 새로운 규범 수립과정에 보다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국제규범 수립을 통한 대외적 영향력을 확대하여야 할 것이다. 각국의 ‘경제안보’ 목적은 국가 간 협력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상호 충돌하는 영역도 있으므로, 우리의 경제안보 목적에 최대한 부합하는 방향으로 규범화 노력에 동참하면서 자유시장경제체제의 보편적 가치의 중요성도 염두에 두며 우리 국내제도와 관행의 선진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필요한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한 입장도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경제안보시대에는 패자부활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