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기고] 역사 속의 '미스터 선샤인' 미국과 미군 속의 한국계


[회원기고] 역사 속의 '미스터 선샤인' 미국과 미군 속의 한국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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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용 KODEF 연구위원


  수년 전, 구한말 미군에 입대해 해병 장교가 된 가상의 인물인 ‘유진 초이’의 이야기가 등장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이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드라마는 노비로 태어난 주인공이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국으로 건너가 미 해병대에 입대하고, 이후 미서 전쟁(美西戰爭)에 참전하면서 장교가 된 뒤 조선에 부임하여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드라마야 물론 허구의 이야기이므로 창작의 영역으로 이해해야 하지만, 문제는 이런 가상의 사극 이야기는 실제 역사와 혼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허구는 허구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어디 까지가 사실이고 어디 까지가 허구인지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면, 실제 한국계의 미군 진출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미국은 건국 이전부터 이민 국가였고, 당장 독립전쟁 시기에도 다양한 국적의 지휘관들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 휘하에서 활약했다. 훗날 프랑스 대혁명에서도 활약한 프랑스의 라파예트 백작(Gilbert de Motier/Marquis de Lafayette, 1757~1834), 프로이센 육군 장교 출신으로 미군 초대 감찰감을 지낸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Friedrich Wilhelm Baron von Steuben, 1730~1794) 장군, 프랑스 이민가정 출신으로 ‘늪지여우’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프랜시스 마리온(Francis Marion, 1732~1795) 장군, 폴란드 왕국군 출신으로 미군에 자원 입대하여 참전한 타데우스 코쉬즈코(Andrzej Tadeusz Bonaventura Kosciuszko, 1746~1817) 장군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아시아인의 미국 이주 역사는 19세기 중반에 가서야 시작됐으므로, 미 독립전쟁에 아시아계 군인이 등장하기에는 아직 시기가 일렀다.


19세기 아시아 이민의 물결과 첫 ‘동양인’ 군인

  미 연방 합중국이 건국한 뒤 정식으로 아시아권 국가의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세기 초다. 미국의 일부 기업가들은 하와이에 대규모 농장을 설립했으며, 이 곳에서 일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중국, 일본, 인도, 필리핀 등지에서 노동자를 모집했다. 미국이 1893년에 하와이를 정식으로 병합한 뒤에는 하와이 현지인이나 미 본토인에 비해 인건비가 훨씬 낮은 반면 노동력은 우수한 동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각광을 받았다. 1885년부터 1924년 사이에 약 3만 명의 일본인 이민자들이 하와이로 이주했고, 그 과정에서 미국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배를 탄 조선인 이민자 수천 명도 하와이에 발을 디뎠다. 첫 조선인 이민자들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로 이주했으며, 주로 사탕수수와 파일애플 농장에서 일했다. 1905년까지 637명의 여성과 465명의 아이들을 포함한 7,226명의 조선인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조선인의 이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계기는 미 정부가 1882년 신규 이민을 통한 중국인 노동자의 고용을 금지한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의 통과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인의 미국 이민이 급격히 줄자고종의 정치고문을 지내던 장로교 의료 선교사인 호레이스 앨런(Horace N. Allen, 1858~1932)과 조지 허버트 존스(George Herbert Jones, 1867~1919) 등의 주도로 조선인의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들 조선인들 대부분은 처음 일했던 하와이 내의 농장과 계약이 만료되자 미 본토로 새 일을 찾아 떠났으며, 주로 세탁소나 네일 샵 같은 자영업을 하면서 정착했다. 하지만 이들 초기 이민자의 절반은 미국 사회 정착에 실패하면서 조선으로 귀향했다. 그나마도 미 의회가 1924년 ‘동양인 배척법(Oriental Exclusion Act)’을 통과시키면서 조선인의 이민도 어려워졌지만, 이 법이 동양인의 미국 유학까지 금지하지는 않았으므로 구한말부터 2차세계대전 말까지 주로 망명 정치가나 지식인들이 미국의 유수 대학에서 공부하며 미국 내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1차대전 이후에 시작된 동아시아 3국 이민자들의 미군 진출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조선인’들이 언제부터 미군에 입대했는지는 확인이 쉽지 않으나, 조선인들이 처음 미군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기록은 미서전쟁이 아닌 1차세계대전 전후에 처음 등장한다. 조선계 미국인은 앞서 직업군인을 선택해 장성까지 배출하기 시작한 타 동양계 이민자(예를 들면 중국계, 일본계, 베트남계)에 비하면 군대 진출의 속도가 더딘 편이다. 중국-하와이계 혼혈인 미국인인 고든 정훈(Gordon Pai’ea Chung-Hoon [鍾雲], 1910~1979) 제독은 1934년 애나폴리스(Annapolis) 미 해군사관학교를 개교이래 첫 아시아인으로 졸업한 뒤 2차세계대전 중 구축함과 수상모함 함장을 지낸 뒤 1959년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0년에도 역시 중국계인 윙 푹 정(Wing Fook Jung)이란 인물이 첫 아시아계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 됐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 행적이 불명확한 것으로 봐 오래 군문에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때는 아직 미 공군이 창설되기 전이었지만,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아더 친(Arthur Chin, 陳瑞鈿, 1913~1997)이라는 중국계 미국인이 자발적으로 중국 국민혁명군에 참가해 적기 8.5대를 격추하면서 ‘2차대전 발발 후 첫 미국인 에이스’ 타이틀을 얻었다.

  한편 유사이래 최대규모의 전쟁인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한-중-일계 미국인들이 활약할 기회도 함께 늘어났다. 진주만 공습 후, 미국의 후방에서 일본계 이민자들이 적과 내통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대대적인 일본인 격리가 시행됐다.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일본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충성심이 의심받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직접 진심을 증명할 요량으로 미 육군의 재가를 얻어 일본계 2세(‘니세이[二世]’)로 구성된 VVV(Varsity Victory Volunteers)라는 공병부대를 1942년 2월에 창설했다. 이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궂은 일을 도맡으며 ‘미국인’임을 증명했고, 이를 토대로 미군은 일본계 중심으로 편성한 미 제100 보병대대를 창설했다. 8개월 후에는 미 전역에서 모집한 일본계 미국인 부대인 제442 연대전투단(RCT)이 창설됐고, 이들은 마크클라크(Mark W. Clark, 1896~1984) 중장이 지휘하는 미 제5군에 소속되어 활약했다. 100대대는 부대구호를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the Pearl Harbor)’로 정했고, 442연대는 ‘모든것을 걸어라(Go for broke)’로 정했을 만큼 이들은 일본계 이민사회의 명예 회복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전쟁동안 442연대는 14,000명의 대원중 9,486명이 퍼플하트(Purple Heart/戰傷章)를 수여받았으며, 미군 역사상 최다 부대표창을 수훈 받고, 그 중 4개를 같은 달에 받았을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다. 이 부대에서 싸운 인물 중에는 훗날 하와이 주 상원의원을 지낸 다니엘 이노우에(Daniel K. Inouye, 1924~2012) 대위가 대표적이다. 


한국계 미국인들의 미군 진출- 최초의 한국계 미 육해공군 장교들


  한편 1943년 1월, 포트 베닝(Fort Benning)의 장교후보생 과정을 마치고 임관한 한국계 미국인인 김영옥(金永玉, 1919~2005) 소위가 100대대에 배속되자 한-일 관계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던 대대장은 그에게 타 부대 전출을 원하느냐고 물었는데, 이때 그는 “여기엔 일본인도 없고 조선인도 없다. 우린 모두 다 미국인이며 같은 목적으로 싸울 뿐이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한국계 이민사회의 낮은 위상 때문에 계속 진급에서 피해를 본 듯하다. 1944년 5월 16일, 미 제5군이 독일군의 구스타프 선에서 막히자 그는 직접 적진으로 들어가 독일 병사를 사로잡은 후 방어선 뒤에 전차가 없다는 핵심정보를 얻었다. 이에 고무된 클라크 중장은 구스타프 선을 돌파한 후 김영옥 중위를 찾아와 그 자리에서 전속부관(대위)의 계급장을 떼어 김 중위의 어깨에 달아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김영옥 대위는 2차세계대전 종전 후 전역하여 사업가로 성공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스스로 사업을 접고 군으로 돌아갔다. 최초 그는 육군 보안국(ASA: Army Security Agency) 소속 통역장교로 선발됐으나, 일부러 한국어를 못하는 척하며 야전 전출을 희망해 7사단 31연대 소속 정보장교로 전쟁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는 지속적으로 상관이던 윌리엄 맥카프리(William J. McCaffrey,1914~2006) 중장에게 야전 전출을 희망했고, 결국 31연대 1 대대장으로 보직되어 실전에서 부대를 이끈 미 육군 역사상 첫 소수민족 출신 야전 대대장이 되었다. 그는 1960년대에도 미 군사고문단 일원으로 한국에 파견됐으며, 이 때 한국계 미국인으로 첫 대령 계급을 달았다.

  김영옥 대령 외에도 미 해군과 공군의 모체인 육군항공대에서 활약한 한국계 미국인들도 있었다. 조선인 하와이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미 육군항공대에 입대한 프레드 오(Fred Ohr,1919~2015) 소령2)은 지중해에서 활약하며 총 23기 격추(17대는 지상격파)를 달성해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 에이스가 되었으며, 52 전투비행단 2비행대대장에 보직되어 사상 첫 아시아계 비행대대장이 되었다. 해군에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녀인 안수산(Susan Ahn Cuddy, 1915~2015) 여사가 ‘최초’의 타이틀을 얻었다. 아직여성을 배에 잘 승선시키지도 않던 시절에 군문을 두드린 그녀는 미 역사상 첫 아시아계 여군 장교가 되었고, 전투병과를 희망해 사상 첫 여군 함포 장교가 됐다. 그녀는 훗날 인터뷰에서 입대 동기를 밝히면서 1938년에 옥중에서 사망한 부친(안창호 선생)을 기억하며 “조선인은 일본의 침략으로 조국을 잃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해 싸우다 죽은 부친을 두었다면, 내게 달리 무슨 선택이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전쟁 말엽 해군 정보실(훗날의 미 국가안보국 NSA)에서 암호 해독 장교로 활동했고, 1946년 전역 뒤에도 계속 이곳에 남아 NSA의 초창기 창설 요원 중 한 명이 되었다. 안 여사는 2015년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으며, 타계 후 그녀의 아들인 필립 커디(Philip Cuddy)씨는 이렇게 어머니를 기억했다.

  “어머니는 그저 문지방을 넘어 발을 걸쳐놓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 붙이셨고, 심지어 그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앉기까지 하셨죠.”


냉전과 한국계 미국인들의 활약, 그리고 그 이후


  미국 내의 이민 사회의 위상은 모국의 위상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1948년에야 건국한 대한민국에 뿌리를 둔 한국인 이민사회는 육군참모총장을 배출한 일본계(에릭 신세키 대장)나 중국계 미국인, 심지어 베트남계보다 불리했음에도 짧은 시간 동안 혁혁하게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처음 장성이 된 인물은 2011년 준장으로 진급해 미 해병 특수작전사령부 사령관을 지낸 뒤 2020년 6월 해병 소장으로 전역한 미 해병대의 대니얼 유(Daniel Yoo, 1962~) 장군이다. 미 육군에서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군의관인 존 조(John M. Cho, 1965~) 장군이 2013년에 현역 준장으로 진급 후 2017년에 퇴역했으며, 예비군에서는 스티븐 커다(Stephen K. Curda, 1960~) 내셔널 루이스 대학교 교수가 2012년 예비군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첫 한국계 미국인 예비군 장성이 됐다.


미국 사회 곳곳에서 활약 중인 한국계 미국인들


  미군 내 한국계 미국인의 장관급 진출은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 타향에서 모든 삶을 걸었던 교포사회 그 자신의 업적이 가장 크지만, 결국에는 미국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위상이 크게 올라간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본 글에서는 미군으로 한정하여 교포사회의 진출을 살펴봤지만, 1984년 아시아계 최초로 연방 대법관을 지낸 허버트 초이(Herbert Young Cho Choy, 1916~2004) 판사나 1993년 첫 한국계 미 하원의원을 지낸 김창준(金昌準/Jay Kim, 1939~) 의원 같은 분의 족적도 특기할 만하다. 2020년에는 제117대 미 의회에 네 명의 한국계 정치가가 하원의원으로 진출했고, 2022년 7월에는 펜실베니아 주 검사로 재직 중인 정경자(Cindy Chung, 1975~)씨가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 제3순회재판소 판사로 지명되어 임관을 앞두고 있다. NASA의 아르테미스(Artemis) 프로그램에는 미 해군 군의관 출신이자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 실(Navy SEAL) 출신인 조나단 김(Jonathan Yong Kim, 1984~) 소령이 2017년부터 참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미국 내 교포사회의 위상이 크게 신장된데다 다양한 분야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으므로 군에서도 곧 한국계 중장이나 대장이 배출될 날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