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회원기고] 반세기를 벼려낸 강철의 동맹군 – 한미연합사 창설 44주년과 그 미래-윤상용


반세기를 벼려낸 강철의 동맹군 – 한미연합사 창설 44주년과 그 미래


윤상용 (KODEF 전문위원)



전무후무한 사상 최대 규모의 ‘세계 연합군’, UN사의 창설


  1953년 7월 27일. 3년간의 길고 길었던 6.25 전쟁이 드디어 휴전에 들어갔다. 언젠가는 다시 전쟁이 재개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일단은 전쟁에 참전했던 모든 국가가 한 숨을 돌리면서 다시 평시체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휴전협정 발효 뒤인 1953년 10월에는 UN군으로 참전 중이던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이 귀국했고, 11월에는 프랑스가 약 50명을 제외한 병력 대부분을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이듬해에도 UN군으로 참전해 있던 국가들이 하나 둘 철군을 진행하면서 2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3월에는 뉴질랜드 군이 한국을 떠났으며 7월에는 터키군, 12월에는 캐나다군과 네덜란드군이 철수했다. 1955년 초에는 필리핀과 벨룩스(BELUX: 벨기에-룩셈부르크) 연합군이 철수했고, 그해 말에는 캐나다 해군과 콜롬비아 해군, 그리스 군이 순차적으로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이듬해에도 계속 단계적인 UN군 철군이 이루어져 1956년 말까지 UN사령부 산하에 들어왔던 17개국 전투부대 대부분이 고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대부분의 참전국 군대가 귀국한 뒤에도 UN군의 중핵으로 남아 한반도에 계속 주둔하게 된 미군은 주한미군사령부(USFK: United States Forces Korea)를 1957년 7월 1일자로 창설해 혹시라도 전쟁이 재개될 경우 UN군에게 제공할 전투병력과 물자 제공, 그리고 평시의 대한민국 방어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6.25 전쟁 초에 창설된 UN군은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이 구성했던 다국적 전투부대이며, 전투부대와 의료부대 파견국 22개국, 물자지원 및 재정지원국만 39개국이 나섰으며 볼리비아, 브라질, 니카라과 3개국이 필요시 지원의사를 표명했다. 이런 60개국 이상을 아우르는 초대형 연합군이 신생 독립국인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구성될 수 있던 것은 아직 냉전 초창기 시절 공산진영 국가들이 아직 UN의 제도에 익숙하지 않았던 덕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이 개시되자 이를 “UN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노르웨이 출신의 UN 사무총장 트뤼그베 리에(Trygve Lie, 1896~1968 재임기간 1946~1952)는 곧장 UN 안전보장이사회(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이하 안보리)를 소집했다. 당시 상임이사국 5개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은 모든 안건을 엎어버릴 수 있는 권한인 ‘비토(veto)’권이 있었지만, 이날 회의에는 상임이사국 중 유일한 북한편인 소련이 아예 회의장에 대표를 내보내지 않았다. 당시 소련은 타이완 섬으로 피신한 중화민국(현재의 대만)이 본토 중국을 장악한 중화인민공화국 대신 UN 상임이사국에 들어있다는 사실 때문에 1950년 1월부터 UN의 모든 회의를 보이콧 중이었고, 이 때문에 주(駐) UN 소련 대사인 야코프 말리크(Yakov A. Malik, 1906~1980) 대사도 안보리 회의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북한의 대한민국 침공을 UN 명의로 규탄하고, 북한에 대해 ‘즉각적인 적대행위를 중단하여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권고한 UN 결의안 82호(UNSC Resolution 82)가 9-0[1]으로 만장일치 통과됐다. 이틀 뒤인 6월 27일에는 ‘북한이 결의안 82호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UN 한국위원회 보고서에 근거하여 UN이 대한민국을 지원할 목적의 UN군을 구성한다는 내용을 담은 UN 결의안 83호까지 안보리에서 7-1[2]로 통과됐다. 말리크 대사는 뒤늦게 실수를 깨닫았지만 UN의 6.25 전쟁 개입을 막기 위해 손쓰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대신 그는 이후 6.25와 관련된 모든 안보리 회의에 참석해 공산진영에 불리한 내용마다 비토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UN 결의안 82,83호를 근거로 창설이 진행된 UN사령부(UNC: United Nations Command)에는 미국을 위시한 전세계 60여 개국이 직, 간접적으로 참여했으며, 3년여의 전쟁기간 동안 총 600만 명이 넘는 병력이 전세계에서 파병되어 갓 건국한 동방의 이 작은 국가를 지켜냈다. 

 


데탕트(解氷)가 야기한 UN사의 위기와 한미연합사의 탄생

 

  치열했던 3여년의 전쟁 후인 1953년 7월 27일, 625 전쟁이 휴전에 돌입하면서 한국과 미국은 10월 1일자로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6.25 전쟁 초반, 전쟁 수행의 효율성을 위해 1950년 7월 12일에 대전협정을 체결하면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OPCON: Operational Control)을 미군에 이양했었고, 작전권은 다시 미 극동사령관(FECOM: US Far East Command)이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원수가 UN사령관을 겸임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UN사령부가 행사하게 됐다. 휴전 뒤에도 UN 사령부는 한국에 파병된 미군을 비롯한 전 자유진영 병력의 총 지휘권을 행사했으나, 문제는 베트남 전쟁으로 야기된 미국의 여론의 피로가 1970년대부터 해외 개입 중인 미군 병력의 철수를 강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닉슨(Richard M. Nixon, 1913~1994) 대통령은 1969년부터 베트남에서 단계적으로 병력을 빼기 시작했고, 대신 남 베트남 군을 훈련시켜 공백을 메운다는 “베트남화(Vietnamization)” 정책을 밀었다. 베트남전 종전을 공약으로 밀었던 닉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종전시킨다는 결의가 강했고, 핵까지 사용한 닉슨의 협박에 소련과 중국도 베트남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북 베트남은 1972년부터 미국이 철군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공세 수위를 서서히 올렸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은 계속 철군에만 집중했고, 특히 닉슨 행정부는 한국에 주둔 중이던 미 제 7사단을 재편 목표 육군사단(ROAD: Reorganization Objective Army Division)으로 지정해 재편을 실시하다가 1971년부로 한국에서 철수시킨 뒤 캘리포니아 주의 포트 오드(Fort Ord)로 이전해버렸다. 결국 이 과정에서 UN 사령부의 해체 주장까지 등장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미국과 한국이 모두 해체에 동의하는 상황이 연출됐으나 그 이유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시 미국은 닉슨의 ‘핑퐁외교’를 시작으로 중국과 해빙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는데, 미국이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시도한 이유는 소련과 중국 간의 갈등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레닌과 스탈린주의를 포기하려는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S. Khrushchev, 1894~1971) 서기장의 방침에 반대했으며,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를 맹 비난했다. 이에 소련은 중국 공산당의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1958~1962) 및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1976)의 실패를 조롱했으며, 악화일로를 걷던 두 공산주의 거두 국가는 1969년 만주지역에서 벌어진 중-소 국경분쟁(1969)으로 완전히 틀어진 상태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소련이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고 위구르족의 반란을 부추기려 했던 정황이 밝혀지면서 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미국은 이 점을 파고들어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정신에 입각해 중국을 회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닉슨 행정부는 UN사의 해체가 중국과 관계 정상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으며, 훗날 국가안보회의(NSC) 내부 메모에 따르면 “(UN사 해체는) 중국과 관계 정상화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동맹국인 한국의 반대를 억제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뿐만 아니라 닉슨은 베트남의 ‘베트남화’ 정책을 시작으로 각 동맹국들이 자체적인 방위능력을 어느 정도 갖추도록 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었는데, 이 또한 UN사 해체의 명분으로 이용됐다.

  반면 한국은 UN사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했다.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정부는 닉슨 행정부 초창기부터 주한미군 철군 방향으로 미국의 정책이 흘러가는 것에 우려하고 있었으며, 만약 미국이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할 경우 북한과도 수교를 해 북한이 재침할 경우 미국이 관망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UN사에는 한국이 전혀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철수’를 선언해도 한국정부가 개입해 철군을 저지할 명분이 없었다. 1975년에는 남북한이 각각 UN 총회에 한반도 문제에 대한 결의안 초안을 제출했으나 내용은 서로 상충했다. 북한은 미군이 완전히 한반도를 떠날 것을 촉구했지만 한국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의 지분이 없는 UN사의 해체에는 부분적으로 동의한 반면, 미군 자체는 한국에 계속 잔류하기를 희망했다. 결국 두 제안은 합의점이 없었기 때문에 채택되지 못했다.

 

  한편 미국은 UN사 해체 문제를 UN 총회에서 계속 논의했으나, 미국의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1923~) 국무장관은 “한국을 위해 현실적이면서 UN사령부의 대체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았다. 그는 가급적 미군이 계속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는데, 이 때 떠올린 방안이 UN사와 별도로 한국과 미국이 50:50으로 지분을 행사하며 미군 장성이 지휘권을 가진 한-미 연합사령부를 창설하는 것이었고, 한국정부도 당연히 이에 찬성했다. 비록 UN사령부 존속 문제는 1975년까지 UN 총회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종결됐지만 대신 ‘한미연합사령부’의 창설이 새롭게 추진됐다. 하지만 그 사이에 정권이 바뀌면서 1977년에 취임한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 대통령은 공약부터 한반도 철군을 들고 나왔고, 전 정권이 시작한 한미연합사령부(ROK-US Combined Forces Command)가 1978년 11월 7일에 창설되자 이를 주한미군이 철군하면서 미군의 임무를 한국군에게 이양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용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한미군을 철군하겠다는 카터 행정부의 의지를 군과 미 의회, 미 정보공동체가 나서서 저지했으므로 여론이 돌아서기 시작했고, 카터 역시 1979년 1월 20일자로 대통령검토각서(PRM: Presidential Review Memorandum) 45호를 통해 주한미군 철군 문제를 보류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이다. 그나마도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론은 사실상 명분을 잃었고, 이듬해인 1980년 대선에서 카터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후보에게 패배함에 따라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은 완전히 백지화되었다. 하지만 한미연합사령부는 그대로 존속하게 되었으며, 카터가 바꾸었던 용도 대신 유사시 한반도 내의 한국군과 미군의 작전권을 단독 행사하는 미군 4성장군급 야전 전투지휘사령부로 탈바꿈했다.

 


반세기동안 다듬은 최강의 동맹체, 한미연합사

 

  한미연합사령부는 이후 UN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의 역할을 흡수했으며, 한미연합사령관은 동시에 UN사령관과 주한미군사령관 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부대의 구성도 철저하게 ‘연합’ 형태로 마련해 가급적 주요 전력을 차지하는 국가 쪽이 해당 구성군의 지휘관을 맡으며, 차석은 반드시 상대국 지휘관이 교차로 맡도록 설계했다. 즉, 미군 대장인 한미연합사령관의 차석인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한국군 대장이 맡도록 했고, 유사시 한국군 병력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될 지상구성군사령부(지구사: GCC)의 사령관 역시 한국군 대장(연합사 부사령관이 겸임)이 맡았다. 반면 미 제 7함대가 주축인 해군구성군사령부(해구사: NCC)는 미 해군 제독이 사령관을, 한국군 제독이 부사령관을 맡는 식이다. 특히 한미연합사는 이 원칙에 따라 거의 전세계에서 전례 없이 미군이 구성군 형태에 따라 한국군 장관급의 지휘를 받게 되도록 설계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예를 들자면 지작사 예하인 한국군의 육군 제1, 3야전군사령부(2019년 지상작전사령부로 통합) 산하에는 미 육군의 2개 군단 및 예하 전투사단이 각각 1, 3군에 유사시 증원으로 파견되어 한국군 야전사령관(대장)의 통제를 받도록 설계했다.

 

  세계 각국은 냉전 이래 ‘연합’을 지향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표적인 기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있고, 독일과 프랑스를 주축으로 확장된 유럽연합군(Eurocorps)도 현재 11개의 회원국을 두고 EU 및 NATO와 협조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상하이 협력기구(SCO: 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 뿐 아니라 아랍국가를 주축으로 한 아랍연맹(the Arab League)도 2007년부터 다시 부활하여 중동지역 중심의 평화유지군 활동을 추진 중이다. 그 밖에도 동남아-태평양 지역의 구 영연방 중심으로 구성된 5개국 방위체제(FPDA: Five Power Defense Arrangement: 호주,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싱가포르, 영국이 참가), 구 소련 6개국으로 구성된 집단안보협정기구(CSTO: Collective Security Treaty Organization), 페르시아만 주변국의 군사협력체인 반도 방어군(Peninsula Shield Force), 그리고 통칭 ‘파이브아이즈(Five Eyes)’ 국가로 분류되는 5개국을 중심으로 한 ABCANZ 프로그램도 있다. 이렇듯 세계에는 다양한 군사기구들이 모두 유사시 ‘모여서 싸우기 위해’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언어와 문화가 다른 2개국 군대가 반세기 넘게 함께 훈련하면서 발맞춰 온 한미연합방어체계는 전세계 각국이 부러워할 군사 및 안보 ‘자산’이다. 실제로 한미동맹 전력은 양자(兩者) 군사동맹 기준으로 전력의 양과 질에서 가장 최상위권 동맹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올해로 44주년을 맞이한 한미연합사령부의 창설을 축하하며, 앞으로도 한미 연합방어체계의 중추로써 더욱 더 단단해 지기를 기원한다.

 

[1] UN 결의안 82호는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중화민국), 쿠바, 에콰도르, 이집트, 인도, 노르웨이 9개국이 찬성하고 유고슬라비아가 기권했으며 소련이 불참했다. 

[2] UN 결의안 83호는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중화민국), 쿠바, 에콰도르, 노르웨이 7개국이 찬성하고, 유고슬라비아가 반대했으며, 이집트와 인도가 현장에서 기권했다. 소련은 이 날 회의도 불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