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 70주년 특집 3]
한미동맹, 6.25 전쟁의 '혈맹'에서 인도-태평양 시대의 중추 동맹으로

박 영 준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소장)
한미동맹 체결의 글로벌 의의
1953년 한미동맹이 체결되던 시점의 한국은 총체적 국가안보위기 국면에 처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에 의해 국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고, 국토는 폐허화 되었으며, 국민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상태에 빠졌다. 애초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았던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북한 남침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군 병력 파견을 결단했고, 유엔의 승인 하에 유엔군사령부를 조직하여 16개국 이상의 유엔 회원국들을 가세시켰다. 가까스로 북한의 공세를 막아내고, 휴전협정 체결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나, 휴전 이후의 한국 안보에 대해서는 여전히 취약성과 불안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한 한국 안보의 취약성을 보강한 결정적인 안보메카니즘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집요한 외교와 미국의 한반도 전략환경 재평가가 결부되어 체결된 한미상호방위 조약과 그에 따른 주한미군의 주둔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한미동맹은 북한의 무력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한국 안보의 필수재라는 의미 외에, 냉전기 미국의 대전략 차원에서도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한미상호방위 조약 체결 이전에 이미 미국은 냉전기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에서 1949년 4월, 유럽 지역에서 나토 동맹을 결성하였고, 1951년 9월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각각 일본, 필리핀, 호주 및 뉴질랜드 등과 동맹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방면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고자하였던 것이다. 다만 1954년 이후에 체결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나 미국-타이완 동맹을 포함한 여타 미국 주도의 동맹들과 달리, 한미동맹은 직접 공산주의 세력의 무력침공과 맞서 싸우며 체결되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혈맹(血盟)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지난 70여년간 한국이 냉전 시대의 빈곤약소국에서 21세기에 접어들어 경제력과 군사력 지표에서 세계 10위 수준의 글로벌 중추 국가로 발전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봐서도, 한미동맹은 40여개 이상에 달하는 미국 주도의 양자 동맹 가운데 가장 성공한 동맹 사례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대칭 동맹에서 보다 대등하고 제도화된 동맹으로의 발전
국제정치학자들은 동맹의 유형에 관해 대등한 국력 수준을 가진 국가들 간에 동맹을 결성하는 대칭형 동맹과 그렇지 않은 국가들이 동맹을결성하는 비대칭 동맹이 있다고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비대칭 동맹 관계에 있는 약소국들은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 국가적 자율성을 희생하는 경향이 있다고도 지적한다.
분명히 한미동맹은 체결된 시점의 양국간 국력수준이나 국제적 위상의 기준에서 보면 비대칭 동맹의 성격을 지녔다. 때문에 미국은 약소국 한국의 국력 수준을 높이기 위해 유무형의 경제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 정치외교적 측면에서도 한국에 대한 일방적 정책을 취하기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한국 지도자들은, 주권국가로서 한국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강대국인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안보이익을 확보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하였다.
예컨대 1950년대 후반, 동남아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당시 이승만 정부는 1954년과 1958년, 그리고 1959년에 각각 라오스에 1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파병하여 공산주의 세력과의 전투를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미국 측에 전달하였다. 196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정식 참전을 결정하면서 당시 존슨 대통령이 한국 정부에 대해 베트남에 대한 파병을 요청해 왔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맹호 및 백마부대와 같은 전투병력 파병의 결단을 내린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동맹국으로서의 대등한 책무를 다하려는 의지도 분명히 작용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이나 1·21 사태 등 북한의 거듭된 무력공세에 직면하면서 한미동맹은 제도화의 측면에서도 진일보한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즉 이해 5월에 한미 양국은 최초의 국방장관 회담을 갖고, 이후 이 장관급 회담을 양국간의 안보현안을 정치외교적 측면에서 뒷받침하려는 한미안보협의회의(SCM: Security Consultative Meeting)로 발전시켰다. 또한 주한미군의 기존 주둔 태세에 더해 한반도에서 군사분쟁 발생시 본토 주둔 미군 병력이 한반도로 전개되는 과정을 테스트하기 위한 포커스레티나(Focus Retina) 훈련도 1969년 3월에 최초로 실시되었고, 이 훈련은 1976년 이후에는 팀 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으로 개칭되었다. 이같은 동맹의 제도화 및 대등성 추구는 나토나 미일동맹의 그것과 비교해도 획기적인 성격을 갖는다. 미일동맹 간에도 1960년 이후 양국의 외교 및 국방당국자가 협의하는 안전보장협의위원회(SCC)가 가동되었으나, 애초에는 일본측에서 장관급이 참석하는데 반해, 미국은 주일대사 및 주일미군 사령관이 참가하는 비대칭적 모습을 보였다.
비로소 미국측도 장관급이 참가하는 대등한 형태로 격상된 것은 1990년 이후였다. 나토 동맹 차원에서 본토 주둔 미군 병력이 유럽에 전개되는 최초의 훈련인 리포저(REFORGER:Return of Forces to Germany)가 처음 실시된 것은, 포커스 레티나 훈련 직전의 1969년 1월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한미동맹의 대등화와 제도화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1970년대 접어들어서도 지속되었다. 1969년 괌 독트린을 발표한 닉슨 행정부가 이후 주한미군 제7사단 2만명을 철수시키고, 70년대 후반에 카터 대통령이 인권외교를 표방하며,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위기 상황이 발생하였다. 동맹의 위기에 직면하여 박정희 정부는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하고, 양국 합참의장 간에 군사위원회(MCM:Military Committee Meeting)를 제도화하여 한미동맹의 결속을 다졌던 것이다.
이후에도 한국의 지도자들은 보다 대등한 동맹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 역할을 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였다. 1994년 노태우 대통령시기에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한 것, 2000년대 들어와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용산 기지의 반환 및 평택기지로의 이전을 결정한 것, 당시 미국이주도하던 대테러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이라크에 3천명 규모의 병력을 파견한 것이 그 사례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한미동맹에 대한 도전
다만 2020년대의 시점에서 한미동맹은 전례없는 도전적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우선 북한이 김정은 정권 하에서 지속적으로 핵능력을 강화하고, 공세적 핵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2017년 9월까지 6차례의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핵능력을 확보한 북한은 그 운반수단으로서 사거리 1만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ICBM급 화성 15, 16, 17형을 포함한 중장거리 미사일, 그리고 SLBM급 북극성 1, 3, 4형 등을 연이어 발사하고 있다. 급기야 2022년 9월에는 핵무력법을 공표하여, 핵선제공격이 가능한 5가지 시나리오를 명시하면서, 매우 공세적인 핵전략을 노골적으로 천명하고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 간에 전개되고 있는 전략적 경쟁 양상도 한미동맹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전략적 도전이다. 2010년 이후 세계 2위 수준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군사적으로도 2029년까지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 일류 수준의 군대를 건설하겠다는 ‘강군몽(强軍夢)’의 전략을 밝히면서, 해, 공군 능력은 물론 핵능력도 야심적으로 증강하고 있다. 특히 타이완에 대한 무력통일 의지도 숨기지 않으면서, 상시적으로 타이완해협 방면으로 해, 공군 전력을 투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2017년 이후 인도-태평양 전략을 공표하고, 일본, 호주, 인도를 규합하여 쿼드를 결성하고, 중국에 대응하기 위한 연합훈련 등을 실시하고 있다. 한편 2018년 당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폴에서 개최된 북미 정상회담 직후 한미 양국간에 실시되어 왔던 연례 훈련을 중단하겠다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미국의 대중 정책은 바이든 행정부로의 정권 교체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2월에 공표한 인도-태평양 전략서, 같은 해 10월에 공표한 국가안보 전략서, 국방전략서, 그리고 핵태세 보고서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핵전력을 증강하면서 타이완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중국, 그리고 핵 및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지속하고 있는 북한을 위협요인으로 명시하면서, 향후 10년이 국제정세를 좌우할 결정적 시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한 국제안보정세 불안정성에 대응하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지속과 ‘통합억제’ 군사전략의 채택, 그리고 동맹 및 파트너 국가들과의 포괄적 협력태세 구축의 방침을 표명하였다.
이같은 북한 핵전력의 증대, 그리고 미중간 전략적 경쟁 심화 속에서의 인도-태평양 정세 불확실성 증대에 대응하여, 전임 문재인 정부는 극히 소극적인 대응을 보였다. 2018년 4월과 9월,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 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과신을 보였고, 북한 핵능력 증강에 대한 적절한 대응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미중간 전략적 경쟁의 심화 속에 일본, 호주등은 동맹국 미국의 전략에 호응하면서,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동참하면서, 쿼드 및 오커스(AUKUS)를 통한 군사적, 비군사적 협력의 폭을 확대하는데 반해, 한국은 그에 동참하는 태세를 전연 보여주질 않았다. 그 결과 2021년 3월, 미국의 유력 싱크탱크CSIS가 공표한 한미동맹 관련 보고서는 한국이 국력 수준 면에서 주요 국가로 성장하고 있으나,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의 입장을 고수하고 오히려 일본과의 역사적 갈등에 집착함으로써, 글로벌 안보에 유용한 기여를 하고 있지 못하다고 평가하였다.
한미동맹의 미래 과제
위에서 언급한 도전적 요인들에 직면하여 70주년을 맞는 한미동맹은 다음과 같은 과제들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첫째, 북한 핵능력 강화 및 공세적 핵전략 표명에 대응하여 한미 양국은 기존에 노력을 경주해 왔던 것처럼, 확장억제태세의 강화에 일층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22년 12월의 한미 양국간 SCM에서 확장 억제 공약을 재확인한 것이나. 한미 양국의 확장 억제협의회의(EDSCG: Extended Deterrence Strategy and Consultation Group)가 2022년 9월에 재개되어, 확장억제 공약을 재확인하고, 미국 전략자산의 수시 한반도 전개를 확인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에 더해 미국이 확장억제를 제공하고 있는 일본 및 호주 등과 함께하는 확장억제 협력체를 보다 확대하여 그 신뢰성을 증대시키고, 미일원자력협정 수준으로 한미간 관련 협정을 개정하여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범위를 확대하고 핵 잠재력 수준도 높일 필요가 있다.
둘째, 동맹국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의 참가를 표명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쿼드 등에의 참가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2022년 11월, 윤석열 대통령이 동남아 국가들과의 정상회담에서 우리의 인도-태평양 전략 기조를 밝히고, 이어 12월에 우리 정부 버전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공표한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다.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기존에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 하에서 쿼드 국가들을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는 연합군사훈련이나 비군사적 분야의 안보협력에 점진적으로 참가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안보협력 확대가 중국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밝혔듯이, 중국에 대한 경제적, 비군사적 분야에서의 협력은, 우리의 국가이익을 위해 지속할 필요가 있다.
2020년대 이후 미국은 기존의 허브앤스포크형(hub and spoke) 동맹 구조에 더해, 쿼드나 오커스 등 소다자적 안보협력체를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확대해 가고 있다.
우리도 이러한 미국의 글로벌 안보정책 변화추세를 직시하면서, 우리의 안보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한미동맹을 미래지향적으로 재설계해야 할 것이다.
[한미동맹 70주년 특집 3]
한미동맹, 6.25 전쟁의 '혈맹'에서 인도-태평양 시대의 중추 동맹으로
박 영 준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소장)
한미동맹 체결의 글로벌 의의
1953년 한미동맹이 체결되던 시점의 한국은 총체적 국가안보위기 국면에 처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에 의해 국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고, 국토는 폐허화 되었으며, 국민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상태에 빠졌다. 애초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았던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북한 남침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군 병력 파견을 결단했고, 유엔의 승인 하에 유엔군사령부를 조직하여 16개국 이상의 유엔 회원국들을 가세시켰다. 가까스로 북한의 공세를 막아내고, 휴전협정 체결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나, 휴전 이후의 한국 안보에 대해서는 여전히 취약성과 불안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한 한국 안보의 취약성을 보강한 결정적인 안보메카니즘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집요한 외교와 미국의 한반도 전략환경 재평가가 결부되어 체결된 한미상호방위 조약과 그에 따른 주한미군의 주둔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한미동맹은 북한의 무력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한국 안보의 필수재라는 의미 외에, 냉전기 미국의 대전략 차원에서도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한미상호방위 조약 체결 이전에 이미 미국은 냉전기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에서 1949년 4월, 유럽 지역에서 나토 동맹을 결성하였고, 1951년 9월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각각 일본, 필리핀, 호주 및 뉴질랜드 등과 동맹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방면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고자하였던 것이다. 다만 1954년 이후에 체결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나 미국-타이완 동맹을 포함한 여타 미국 주도의 동맹들과 달리, 한미동맹은 직접 공산주의 세력의 무력침공과 맞서 싸우며 체결되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혈맹(血盟)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지난 70여년간 한국이 냉전 시대의 빈곤약소국에서 21세기에 접어들어 경제력과 군사력 지표에서 세계 10위 수준의 글로벌 중추 국가로 발전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봐서도, 한미동맹은 40여개 이상에 달하는 미국 주도의 양자 동맹 가운데 가장 성공한 동맹 사례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대칭 동맹에서 보다 대등하고 제도화된 동맹으로의 발전
국제정치학자들은 동맹의 유형에 관해 대등한 국력 수준을 가진 국가들 간에 동맹을 결성하는 대칭형 동맹과 그렇지 않은 국가들이 동맹을결성하는 비대칭 동맹이 있다고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비대칭 동맹 관계에 있는 약소국들은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 국가적 자율성을 희생하는 경향이 있다고도 지적한다.
분명히 한미동맹은 체결된 시점의 양국간 국력수준이나 국제적 위상의 기준에서 보면 비대칭 동맹의 성격을 지녔다. 때문에 미국은 약소국 한국의 국력 수준을 높이기 위해 유무형의 경제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 정치외교적 측면에서도 한국에 대한 일방적 정책을 취하기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한국 지도자들은, 주권국가로서 한국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강대국인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안보이익을 확보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하였다.
예컨대 1950년대 후반, 동남아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당시 이승만 정부는 1954년과 1958년, 그리고 1959년에 각각 라오스에 1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파병하여 공산주의 세력과의 전투를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미국 측에 전달하였다. 196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정식 참전을 결정하면서 당시 존슨 대통령이 한국 정부에 대해 베트남에 대한 파병을 요청해 왔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맹호 및 백마부대와 같은 전투병력 파병의 결단을 내린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동맹국으로서의 대등한 책무를 다하려는 의지도 분명히 작용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이나 1·21 사태 등 북한의 거듭된 무력공세에 직면하면서 한미동맹은 제도화의 측면에서도 진일보한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즉 이해 5월에 한미 양국은 최초의 국방장관 회담을 갖고, 이후 이 장관급 회담을 양국간의 안보현안을 정치외교적 측면에서 뒷받침하려는 한미안보협의회의(SCM: Security Consultative Meeting)로 발전시켰다. 또한 주한미군의 기존 주둔 태세에 더해 한반도에서 군사분쟁 발생시 본토 주둔 미군 병력이 한반도로 전개되는 과정을 테스트하기 위한 포커스레티나(Focus Retina) 훈련도 1969년 3월에 최초로 실시되었고, 이 훈련은 1976년 이후에는 팀 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으로 개칭되었다. 이같은 동맹의 제도화 및 대등성 추구는 나토나 미일동맹의 그것과 비교해도 획기적인 성격을 갖는다. 미일동맹 간에도 1960년 이후 양국의 외교 및 국방당국자가 협의하는 안전보장협의위원회(SCC)가 가동되었으나, 애초에는 일본측에서 장관급이 참석하는데 반해, 미국은 주일대사 및 주일미군 사령관이 참가하는 비대칭적 모습을 보였다.
비로소 미국측도 장관급이 참가하는 대등한 형태로 격상된 것은 1990년 이후였다. 나토 동맹 차원에서 본토 주둔 미군 병력이 유럽에 전개되는 최초의 훈련인 리포저(REFORGER:Return of Forces to Germany)가 처음 실시된 것은, 포커스 레티나 훈련 직전의 1969년 1월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한미동맹의 대등화와 제도화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1970년대 접어들어서도 지속되었다. 1969년 괌 독트린을 발표한 닉슨 행정부가 이후 주한미군 제7사단 2만명을 철수시키고, 70년대 후반에 카터 대통령이 인권외교를 표방하며,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위기 상황이 발생하였다. 동맹의 위기에 직면하여 박정희 정부는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하고, 양국 합참의장 간에 군사위원회(MCM:Military Committee Meeting)를 제도화하여 한미동맹의 결속을 다졌던 것이다.
이후에도 한국의 지도자들은 보다 대등한 동맹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 역할을 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였다. 1994년 노태우 대통령시기에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한 것, 2000년대 들어와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용산 기지의 반환 및 평택기지로의 이전을 결정한 것, 당시 미국이주도하던 대테러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이라크에 3천명 규모의 병력을 파견한 것이 그 사례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한미동맹에 대한 도전
다만 2020년대의 시점에서 한미동맹은 전례없는 도전적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우선 북한이 김정은 정권 하에서 지속적으로 핵능력을 강화하고, 공세적 핵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2017년 9월까지 6차례의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핵능력을 확보한 북한은 그 운반수단으로서 사거리 1만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ICBM급 화성 15, 16, 17형을 포함한 중장거리 미사일, 그리고 SLBM급 북극성 1, 3, 4형 등을 연이어 발사하고 있다. 급기야 2022년 9월에는 핵무력법을 공표하여, 핵선제공격이 가능한 5가지 시나리오를 명시하면서, 매우 공세적인 핵전략을 노골적으로 천명하고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 간에 전개되고 있는 전략적 경쟁 양상도 한미동맹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전략적 도전이다. 2010년 이후 세계 2위 수준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군사적으로도 2029년까지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 일류 수준의 군대를 건설하겠다는 ‘강군몽(强軍夢)’의 전략을 밝히면서, 해, 공군 능력은 물론 핵능력도 야심적으로 증강하고 있다. 특히 타이완에 대한 무력통일 의지도 숨기지 않으면서, 상시적으로 타이완해협 방면으로 해, 공군 전력을 투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2017년 이후 인도-태평양 전략을 공표하고, 일본, 호주, 인도를 규합하여 쿼드를 결성하고, 중국에 대응하기 위한 연합훈련 등을 실시하고 있다. 한편 2018년 당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폴에서 개최된 북미 정상회담 직후 한미 양국간에 실시되어 왔던 연례 훈련을 중단하겠다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미국의 대중 정책은 바이든 행정부로의 정권 교체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2월에 공표한 인도-태평양 전략서, 같은 해 10월에 공표한 국가안보 전략서, 국방전략서, 그리고 핵태세 보고서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핵전력을 증강하면서 타이완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중국, 그리고 핵 및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지속하고 있는 북한을 위협요인으로 명시하면서, 향후 10년이 국제정세를 좌우할 결정적 시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한 국제안보정세 불안정성에 대응하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지속과 ‘통합억제’ 군사전략의 채택, 그리고 동맹 및 파트너 국가들과의 포괄적 협력태세 구축의 방침을 표명하였다.
이같은 북한 핵전력의 증대, 그리고 미중간 전략적 경쟁 심화 속에서의 인도-태평양 정세 불확실성 증대에 대응하여, 전임 문재인 정부는 극히 소극적인 대응을 보였다. 2018년 4월과 9월,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 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과신을 보였고, 북한 핵능력 증강에 대한 적절한 대응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미중간 전략적 경쟁의 심화 속에 일본, 호주등은 동맹국 미국의 전략에 호응하면서,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동참하면서, 쿼드 및 오커스(AUKUS)를 통한 군사적, 비군사적 협력의 폭을 확대하는데 반해, 한국은 그에 동참하는 태세를 전연 보여주질 않았다. 그 결과 2021년 3월, 미국의 유력 싱크탱크CSIS가 공표한 한미동맹 관련 보고서는 한국이 국력 수준 면에서 주요 국가로 성장하고 있으나,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의 입장을 고수하고 오히려 일본과의 역사적 갈등에 집착함으로써, 글로벌 안보에 유용한 기여를 하고 있지 못하다고 평가하였다.
한미동맹의 미래 과제
위에서 언급한 도전적 요인들에 직면하여 70주년을 맞는 한미동맹은 다음과 같은 과제들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첫째, 북한 핵능력 강화 및 공세적 핵전략 표명에 대응하여 한미 양국은 기존에 노력을 경주해 왔던 것처럼, 확장억제태세의 강화에 일층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22년 12월의 한미 양국간 SCM에서 확장 억제 공약을 재확인한 것이나. 한미 양국의 확장 억제협의회의(EDSCG: Extended Deterrence Strategy and Consultation Group)가 2022년 9월에 재개되어, 확장억제 공약을 재확인하고, 미국 전략자산의 수시 한반도 전개를 확인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에 더해 미국이 확장억제를 제공하고 있는 일본 및 호주 등과 함께하는 확장억제 협력체를 보다 확대하여 그 신뢰성을 증대시키고, 미일원자력협정 수준으로 한미간 관련 협정을 개정하여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범위를 확대하고 핵 잠재력 수준도 높일 필요가 있다.
둘째, 동맹국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의 참가를 표명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쿼드 등에의 참가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2022년 11월, 윤석열 대통령이 동남아 국가들과의 정상회담에서 우리의 인도-태평양 전략 기조를 밝히고, 이어 12월에 우리 정부 버전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공표한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다.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기존에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 하에서 쿼드 국가들을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는 연합군사훈련이나 비군사적 분야의 안보협력에 점진적으로 참가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안보협력 확대가 중국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밝혔듯이, 중국에 대한 경제적, 비군사적 분야에서의 협력은, 우리의 국가이익을 위해 지속할 필요가 있다.
2020년대 이후 미국은 기존의 허브앤스포크형(hub and spoke) 동맹 구조에 더해, 쿼드나 오커스 등 소다자적 안보협력체를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확대해 가고 있다.
우리도 이러한 미국의 글로벌 안보정책 변화추세를 직시하면서, 우리의 안보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한미동맹을 미래지향적으로 재설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