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회원기고] 미중동맹과 타이완관계법으로 풀어본 ‘동맹의 무게와 가치’-윤상용


미중동맹과 타이완관계법으로 풀어본 ‘동맹의 무게와 가치’


윤상용 (KODEF 전문위원)


  최근 중국-타이완 간 양안(兩岸) 기류가 심상치 않다.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미 하원의장의 타이완 방문 후 타이완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갈등은 첨예해지고 있고, 선수를 뺏긴 중국은 타이완 섬 주변 6개 지역을 훈련지역으로 일방 선포한 후 상륙훈련과 미사일 연습 등을 실시해 긴장을 높이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올 가을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3차 연임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업적에 목이 말라 있으며, 그 일환으로 중국의 오랜 문제인 ‘타이완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모양새다. 한편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타이완 문제에 대해 “하나의 중국 원칙은 존중하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은 반드시 타이완을 방어할 것”이라고 천명해 미-중 간의 긴장 수위가 높아진 상태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은 왜 군사력이나 영토크기, 인구 면에서 중국에 비교조차 어려운 타이완을 이렇게까지 지키려는 것일까? 만약 중국이 타이완을 침공한다면 과연 미국은 중국과 전면 대립을 감수하면서 이 멀고도 작은 섬을 지키기 위해 개입할 지의 여부가 많은 이들의 관심사인데, 그 해답은 미-타이완 간의 ‘동맹’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항상 동맹의 가치를 중요시해 왔으며, 지금 우리도 이 ‘동맹’을 위해 미국이 엄청난 인력과 예산을 쓰면서 한미연합방어체계를 지켜오고 있는 모습을 오늘날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과 타이완의 역사는 미국의 동맹 정책과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며, 한미동맹에 있어서도 참고할 부분이 있는 선례이다.


미-중화민국 관계의 시작과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탄생


  오늘날 ‘타이완(臺灣)’으로 불리는 중화민국(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과 미국의 관계는 신해혁명이(辛亥革命) 터진 1911년 이후에 시작됐다. 청조(淸朝)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중화민국은 비록 북양군벌(北洋軍閥)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초대 대총통자리를 차지한 뒤 제국을 선언해 잠시 그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지만, 그가 즉위 83일만에 국내외 압력으로 퇴위하면서 쑨원(孫文, 1866~1925)이 돌아와 국민정부를 수립했고, 곧이어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 행정부(1909~1913)가 신생 중화민국 정부와 접촉하면서 국민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당시 중국은 북양정부가 깨지면서 군벌이 난립했지만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1928년까지 사실상 중국 전토를 장악했다. 한편 “포모사(Formosa, 福爾摩沙)”로 부르던 타이완 섬은 이 때 까지만 해도 이 섬은 명나라 재건운동이 진압된 후 아무도 중국의 일부로 간주하지 않는 원주민의 섬이었으며, 1차 중일전쟁(1894~1895) 후 체결된 시모노세키(下関) 조약으로 일본에 할양됐다. 미국은 1941년 12월 4일,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공습을 받은 뒤 독일-일본-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추축국에 대항하여 영국, 프랑스, 소련 및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중화민국이 추축이 된 연합국에 참가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리없는 전쟁’인 냉전(冷戰)이 시작하면서 세계 판도는 다시 한 번 크게 뒤집혔다. 이번에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세계가 두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자 중화민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중요한 동맹 파트너가 됐다. 하지만 중화민국은 2차대전 후 벌어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공산군에게 패하자 일본으로부터 반환 받았던 타이완 섬으로 퇴각했으며, 미국의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행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화민국과 구분을 위해 중공[中共]으로 표기)이 타이완해협을 건너 중화민국을 추격하는 상황을 막고자 미 제 7함대를 전개해 해협을 차단했다. 사실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은 타이완으로 일시 퇴거하여 전열을 정비한 후 다시 본토 수복에 나서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이미 인구도, 병력도 열세가 되어버린 중화민국이 중공을 꺾고 본토를 다시 장악하는 길은 요원해 보였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타이완 섬은 미국의 보호가 없다면 당장 중국에게 함락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 때 두 중국의 충돌이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을 야기할 지 모른다는 우려를 한 트루먼 행정부는 1950년 1월 5일부로 ‘미국은 양안(兩岸)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중공이 중화민국을 공격하더라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천명해 중화민국은 사실상 중공의 위협으로부터 무방비 상태가 됐다. 하지만 미국은 1950년 6월 25일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양안 문제에 대한 방침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업은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자 미국은 긴급히 대한민국을 지원하며 전쟁에 개입했지만, 문제는 중공이 미국의 집중성을 흩트리거나 발을 묶기 위해 타이완 섬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 미 국무부 외교정책보좌관에게 타이완해협을 ‘중립화’하도록 지시했으며, 최대한 중공의 타이완 공세를 저지하지만 거꾸로 타이완이 중공을 치는 상황도 발생하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하도록 명령했다.


  1953년 8월 27일, 냉전 발발 이후 첫 공산-자유진영의 전쟁이 된 6.25 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됐다. 사실 1941년 2차 세계대전 때부터 거의 쉴 새 없이 달려온 미국도 6.25 휴전을 통해 모처럼 한숨을 돌리게 됐으며, 앞으로 자유-공산권 간의 분쟁은 어디서 시작되든 연쇄반응을 일으켜 대전(大戰)으로 확전 될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았다. 이에 따라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동맹체의 필요성을 깨닫았지만, 동아시아 지역은 유럽과 환경이 크게 판이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같은 형태의 집단방어, 집단공격형 군사기구 구성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가장 큰 이유는 같은 자유진영 내에서도 각국의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 국가부터 독재국가까지 범위가 넓고, 유럽처럼 단 하나의 공동 위협(소련)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아직 10년도 지나지 않은 2차 세계대전의 상흔 때문에 한-중(중화민국)-일 간의 심리적 앙금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동맹국들과 개별적으로 양자간 상호방위동맹 체결을 추진했으며, 이에 미국과 대한민국은 1954년 11월 1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고, 미국과 중화민국은 중-미공동방어조약(中美共同防御条约, 혹은 SAMDT: Sino-American Mutual Defense Treaty/이하 중미조약)을 1954년 12월 2일에 체결했다. 중미조약은 이듬해 3월 3일자로 발효됐으며, 이미 앞서 1951년 9월 8일 미국-일본 간에 체결된 미일안전보장조약(美日安全保障條約) 및 1951년 8월 30일에 체결된 미-필리핀 상호방위조약과 함께 통칭 샌프란시스코 체제(San Francisco System)의 일부가 되었다. 이 체제는 ‘바퀴 축과 바퀴살(hubs-and-spokes)’ 이라 불렸는데, 이는 바퀴 축(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바퀴처럼 목적에 따라 필요한 양자간 동맹을 활용하겠다는 미국의 아시아 지역 동맹 정책이었다.


행정부에게 버림받은 동맹, 그리고 이를 구해낸 의회


  이 중미조약은 사실 말이 좋아 “공동방어” 조약이지, 다른 여타 미국의 상호방위조약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으론 미국의 일방적인 지원만이 예상되는 동맹체였다. 중미조약은 타이완 섬과 펭후(澎湖)제도(혹은 페스카도레 제도)로 적용 지역을 한정했으며, 마쭈(馬祖) 섬과 진먼도(金門島)는 조약의 적용 범위에서 제외했다. 이 때문에 중공은 1958년 2차 양안위기가 일어나자 일부러 중국 본토 샤먼(厦門)에서 10km (타이완에서는 187km)밖에 떨어지지 않은데다 중미조약에 보호를 받지 않는 진먼도에 수시로 포격을 가했다. 1958년부터 포격을 시작한 중국은 1970년대까지도 진먼도에 산발적인 포격을 가하며 의도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최근 펠로시의 방문 후 중국이 타이완 섬 주변에 지속적으로 포격과 미사일 시험을 하는 것과 겹쳐 보인다.


  미국과 중화민국의 ‘동맹’은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끝이 났다. 이 조약은 10조 내용에 따라 조약국 중 하나가 상대방에게 조약 폐기를 통보하면 1년 후 자동 파기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는데, 미국의 카터(Jimmy E. Carter, Jr., 1924~) 행정부가 1979년 1월 1일자로 중공과 수교하면서 조약에서 나갔고, 이에 따라 1980년 1월 1일에 조약이 폐기된 것이다. 날벼락을 맞은 중화민국 정부는 광범위한 로비로 중미조약을 폐기하려는 카터 행정부의 결정을 뒤집으려 했지만 무위로 끝났고, 상원 군사위원장을 맡고 있던 공화당의 베리 골드워터(Berry M. Goldwater, 1909~1998) 의원은 의회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조약을 폐기한 카터를 상대로 대법원 소송까지 갔다. 뿐만 아니라 양당의 의원 일부는 공동으로 동맹에 대한 미국의 신뢰성을 위해 타이완을 이대로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성명을 냈다. 특히 미국이 중화민국 보호를 포기하는 것은 사실상 중공의 타이완 침공을 방조하는 결과였고, 이는 다른 동맹에게 좋지 못한 신호를 줄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하원 외교위원회는 비(非)수교국이 된 중화민국을 보호하기 위해 중미조약을 대체할 ‘타이완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을 입법했고, 이는 1979년 3월 13일~14일 양일간 일사천리로 상하 양원을 통과했다. 타이완관계법은 그간 중화민국과의 상업, 문화를 비롯한 기타 교류관계를 공식 외교관 파견 없이 유지한다는 데 골자를 두었으며, 중국 때문에 동맹을 버렸다는 비난을 피하려던 카터 역시 1979년 4월 10일에 서명했다.


  이렇게 탄생한 타이완관계법은 사실 특이한 형태의 외교 조약이 됐다. 일단 양자간 협정이나 조약이 아니며, 타이완과 비공식적으로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특이한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미국이 앞으로 “중화민국”이라는 용어 대신 “타이완”을 쓰기로 했으며, 대신 “타이완”의 영역에 진먼도와 마쭈섬을 포함했다. 타이완 관계법의 가장 핵심은 군사 분야였다. 이 법은 동맹이나 군사조약이 아니므로 미국의 타이완 문제 개입을 약속하지는 못했으나, 미국은 기존 타이완 정책을 유지할 뿐 아니라 “의회의 동의가 있다면” 타이완을 방어할 수 있다는 내용을 넣었다. 일명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에 따라 타이완 방어 시에 전개할 구체적인 미군의 병력 규모나 병종, 물자를 조약에 명시하지 않았지만 적절한 수준으로 타이완 방어 의무를 포함했으며, 타이완이 자체적인 방어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산 물자를 제공 혹은 판매해야 한다는 내용도 들어갔다. 한편 당시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 지위를 원하던 중국은 미국의 수교 조건에 가깝던 ‘타이완관계법’에 대해 묵시적으로 양해했다.


미-중화민국 관계가 보여주는 동맹의 미래


  비록 중미조약은 정치적인 이유로 시간이 지나면서 변색됐지만, 미국은 한 번 ‘동맹’으로 인정한 국가를 쉽게 버리지 않는다는 선례를 남겼다. 삼권 분립이 분명한 미국 정치체제에서 대통령이 독선적으로 동맹을 버리려 하자 의회가 나서서 이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도 눈 여겨 볼 부분이다. 그간 꾸준히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해 온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당 전당대회와 시진핑의 3차 집권 시도에 맞춰 다시 타이완 해역에 긴장을 조성했고, 미국은 타이완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상태다. 실제 중국이 타이완을 침공하고, 미국이 방어에 나선다면 전쟁의 향방은 예측하기가 어렵지만, 타이완 국민들은 미국이라는 든든한 우방을 믿고 오늘도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실제로 8월 초에 실시된 BBC의 여론 조사에서는 타이완 국민 중 양안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믿는 인구는 7%에 불과하고,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23.7%)와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40.6%)로 본 인구가 64.3%에 달한다. 이렇게만 보면 타이완 국민이 전쟁 위협에 대해 안이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2010년을 기점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중국인”이 아닌 “타이완 국민”이라고 생각하는 인구가 40%대에서 60%대까지 치솟은 것을 보면 정부에 대한 신뢰, 그리고 ‘동맹’ 미국에 대한 신뢰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8월 ‘만약 타이완이 공격받는다면 미국이 지킬 것’이라고 분명히 못박았으며, 이는 미국은 한 번 맺은 동맹관계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냉전 이후 전세계 군사안보동맹은 빠르게 변화 중이다. 기존 냉전 시절에는 비슷한 지역 내에서 공통의 적을 가진 국가들이 하나의 군사안보동맹체를 형성했다면, 이제는 지역을 국한하지 않고 가맹국을 모아 불특정한 잠재적 위협에 대비해 형태로 진화 중이다. 바르샤바 동맹(WTO) 소멸 후 목표를 잃은 NATO만 해도 한때 표류하는 분위기였으나, 이제는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 격차의 제한을 두지 않고 동맹체를 확장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냉전시절 공산진영에 소속되어 있던 국가까지 아군으로 받고 있다. 21세기 이후 군사안보의 키워드는 동맹과 연합이 될 것이며, 이 동맹의 가치를 존중하는 국가들 만이 세계적인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 것도 없던 반세기 전에 한-미 동맹이라는 든든한 축을 얻은 대한민국은 신의 가호가 따랐다. 그리고 앞으로 한미동맹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이번 세기 한국의 위상과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