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독자투고]슈미트 수상과 균형 전략-박철균


슈미트 수상과 균형 전략

 


박철균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前 국방정책실 국제차장

 

  2008년 조지아의 남오세티아 사태와 2014년 크림반도 합병, 그리고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공격을 지켜보며 독일의 슈미트 수상과 그의 균형 전략이 소환된다. 과연 서방세계가 러시아의 침략 행위에 대해 그간 얼마나 실효적이고 균형된 대응을 해왔을까?


  슈미트 수상은 매우 특이한 이력을 지닌 독일 사회민주당의 정치인이자 경제 전문가요, 군사 전략가이다. 그는 1918년 본에서 출생하여 나치 통치 시절에 성장했다. 유대인 할아버지의 가족력이 있기는 했으나 그는 나치군 대위로 2차 대전에 참전하여 1941년 초급 장교로 전쟁을 몸소 경험했고 1955년에는 독일 연방군의 예비군 대위가 된다. 슈미트는 1953년 함부르크에서 사민당 정치인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한다.


  그는 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 사민당 내의 안보 전문가로 늘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했고 당시 나토의 대량보복전략이 과연 효과적인 억제를 담보할 수 있는 정책인가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졌다. 만약 동・서 진영이 전쟁하게 된다면 미국의 대량보복전략으로 인해 그의 조국 독일이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의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깊은 우려를 했다. 독일의 영토가 유럽의 주전장으로 계획되어 있던 NATO의 전략에 독일의 생각이 중요하게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대량 보복전략 보다 더 신뢰성 있는 억제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슈미트는 수상은 1961년에 미국의 대량 보복전략을 비판하는 유명한 저서, 『방어인가 보복인가』를 출간했다. 그는 저서에서 힘의 균형과 군비통제, 전쟁 억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힘의 균형은 결코 정적이지 않고 늘 변한다. 모든 국가는 어떠한 시기에도 요구되는 대응적 균형력을 창출하는데 사활적 이익을 걸어야 한다. 서방은 소위 군사적 균형만을 유지하고 다른 노력은 하지 않으려고 하면 안된다. 서방이 군비통제나 군축, 베를린 문제나 독일 통일 등 쟁점이 되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논의하려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지속적인 노력을 집중하여 모든 수준에서의 균형을 달성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그리고 세계의 어느 지역에 대해서도 필요하다.

 

  슈미트 수상은 궁극적으로 서방이 원했고 당시 분단국가였던 서독에 매우 중요한 이슈였던 통일 문제와 군축, 군비통제 문제를 상대와 협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려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힘의 균형 달성을 위해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지구촌 전체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괄적 힘의 균형 달성의 최종 목적은 군축과 군비통제를 통한 평화였다. 군사적인 면에서 군비증강을 군축이나 군비통제와 군축의 수단으로 삼았다. 군축과 군비통제의 협상전략 측면에서 균형전략은 상대국을 합리적 의사결정자로 인식하고 동등한 가치의 교환이라는 것을 상정한 상호주의 전략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유럽의 미사일 위기에 대해 슈미트 수상은 1977년 영국 전략문제연구소 초청 연설에서 힘의 균형은 안보의 전제조건이며 데탕트도 힘의 균형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당시 소련의 SS-20 배치 상황이 위험한 군비 경쟁을 할 것인지 성공적인 군비통제를 할 것인지의 국면이라고 했다. 그리고 미·소 간의 SALT-II 협상으로 전략핵 균형이 달성되었는데 이는 상호 간 전략 핵무기의 위력이 상쇄되었다는 의미이며 이로 인해 유럽에서 이제까지 존재했던 나토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대한 전술 핵무기와 재래식 전력의 열세가 더욱 커졌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즉 슈미트 수상은 미국의 소련과의 전략무기 군비통제 합의와 화해 분위기로 유럽 내 나토 회원국이 미국과 멀어질 수 있음을 우려했고 군사력 균형의 관점에선 서독을 포함한 유럽의 나토 동맹국들이 더 심각한 군사적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고 판단했다.


  슈미트 수상의 균형 전략은 결국 당시 구소련과의 전략핵 군축 협의 등에 신경을 쓰며 미국의 유럽 내 중거리 핵전력 배치에 머뭇거렸던 카터 대통령을 움직였다. 미국의 중거리 핵전력을 유럽 대륙에 배치하는 것은 민감한 문제이다. 특히 나름대로 고집이 세기로 유명했던 카터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슈미트 수상부터 실무진까지 피나는 노력을 했다. 결국 카터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구소련과의 군비통제가 성공한다면 나토 역시 핵전력의 규모를 조정할 수 있다는 소위 ‘2중결정’의 제안에 있었다. 나토 회원국의 동의를 구하고 ‘2중결정’을 나토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하는 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이 따랐다.


  결국 슈미트 수상이 원했던 구소련의 미사일에 대한 대응 전력인 미국의 최첨단 중장거리 핵미사일 수백여 기는 1982년부터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은 또 다른 소용돌이 속에 휩싸인다. 미국의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로 유럽에 핵전쟁의 공포가 엄습했고 유럽의 반핵・평화 운동이 대륙 전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유럽 내의 나라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 반대 여론이 40%-60%에 육박했다.


  유럽 내 평화주의 움직임이 동독 내의 평화주의자들을 자극했고 이는 결국 동독의 붕괴를 촉발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슈미트 수상이 속해 있는 사민당은 중도좌파 진보주의 성향의 정당이다. 동방정책으로 유명한 빌리브란트 수상의 정당이기도 하다. 슈미트 수상은 빌리브란트 수상 시절 국방장관과 재무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사민당 내의 반핵・평화주의자들은 사민당을 떠났고 녹색당을 창당하여 1983년에 독일 연방의회에 진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용돌이와 위기 속에서도 슈미트 수상의 균형정책은 유지되었다. 나토와 함께 채택했던 ‘2중 결정’ 정책도 유지되었다. 그리고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쵸프의 극적인 타협으로 미・소 간에 사거리 500km-5,500km의 모든 지상 발상 중・단거리 핵미사일을 폐기하는 INF 조약이 체결된다.


  슈미트 수상은 늘 논란과 쟁점의 중심에 있었다. 연방의회 의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미국과 나토의 전략을 비판했다. 단순한 정치적 비판이 아닌 연구와 고심 끝에 책을 발간하여 자신의 전략과 사상을 피력했다. 슈미트 수상은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이나 헬무트 콜 수상의 독일 통일 등에 비해 역사에 남는 성과는 적었지만, 위기의 독일과 위기의 유럽, 위기의 세계를 탁월한 통찰력과 실천력으로 해결해 나갔다. 함부르크 시장 당시 엘베강 홍수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현장지휘로 인명을 구했고 독일 국민에게 재난 시 정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1970년대 초 1차 오일 파동으로 전 세계의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G7 회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사민당의 정치인으로서 늘 당내 공격을 받았다. 그의 중도우파적인 실용 안보 정책과 친(親)-NATO 노선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유럽의 미사일 위기에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유럽에 미국의 중장거리 핵미사일 배치를 관철함으로써 당내 일부 반핵・환경주의자들이 당을 떠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반면, 그는 독일 국민의 선호도 조사에서 늘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물이었다. 평생 애연가였던 슈미트 수상의 흡연에 대해 독일 국민은 그의 담배 연기는 공해가 아니다, 슈미트 수상의 흡연은 노익장의 상징이라고 했을 정도라 한다.


  2015년 슈미트 수상은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슈미트 수상은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 1950년대부터 평생 각별한 관계였는데, 키신저는 슈미트 수상의 죽음을 접하고 늘 무언가를 추구하고, 신뢰할만하며, 영감에 가득 차 있었던 평생의 진정한 친구였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