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회원기고]한미관계의 출발, 신미양요-최상진


한미관계의 출발, 신미양요

최 상 진 협회 이사


  작년 12월, 5년 전부터 본지 편집위원들이 공동 집필해 오던 6.25 한국전쟁 미국 참전 기념물 탐방 연재물이 “영원한 친구들, Lasting Friends"란 책명으로 협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국영합본으로 발간되었다.

  이름도 모르는 동양의 조그마한 나라에서 꽃다운 젊은 목숨을 던진 미국을 위시한 유엔군 장병들, 같은 민족간 양보없는 살육현장이 된 6.25 전쟁에서 희생된 숭고한 영혼들을 위로하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기를 염원하는 다짐이었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연방관계에 있었던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우크라이나는 과거와 달리 핵무장도 강력한 군대도 해체된 상태에서 동맹도 없이 많은 군인, 민간인들이 적의 공격으로 무참히 살해되었다. 자력갱생(自力更生)과 동맹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진다. 김태웅 교수(서울대 역사교육과)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주의가 점입가경으로 전개되는 현 시점에서 핵보유국을 자처하는 북한의 지속적 미사일 도발은 우리의 진로를 불투명하게 하고 생존을 불안하게 한다. 특히 한국 정부의 애매모호한 대처가 파국을 맞을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있다. 이럴 때 일수록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며 초기 한미관계의 역사와 그 시작을 냉철히 되새길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올해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40주년 되는 해이며 실질적 한미관계 형성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신미양요 발생 151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실질적이고 상호호혜적인 한미동맹과 한미우호를 위해 150년 전 역사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미, 제너럴 셔먼호 방화사건

  19세기 중반 아시아는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시련의 시기를 맞게 된다. 미국은 1844년 청나라와 망하조약(望瘕條約)으로 중국의 문호를 개방하였고 1854년에는 페리 원정함대의 포함외교(砲艦外交)로 일본을 개항시켰다. 당시 조선(이씨조선)은 1863년 12세의 고종이 즉위하면서 아버지 흥선 대원군의 섭정에 들어가 내부적으로는 왕권을 복원하고 외부적으로는 해금주의(海禁主義) 원칙을 강화하여 쇄국양이정책(鎖國洋夷政策)을 펼친다.

쇄국정책의 골자는 전통적으로 중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조선은 서양 오랑캐와 교류를 할 수 없으며 서교(천주교)는 유교적 윤리질서에 기반을 둔 조선의 사회제도와 계층 간의 도덕관을 문란하게 하고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사교(邪敎)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866년 두 개의 큰 사건이 발생하는데 하나는 그해 7월 대동강에서 발생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며 다음은 9월에 강화도에서 발생한 프랑스군 원정의 병인양요이다.

  제너널 셔먼호는 병선(전투함)의 형태를 갖춘 미국 상선으로 선주 프레스톤은 영국 메도스 상사(Meadows & co)와 용선계약을 맺은 후 조선과 통상교역을 실현하겠다는 포부로 중국 천진항을 출발했다.

  교역 물품은 직물류 옥감, 서양 그릇, 자명종 등 이었으며 그들이 구입하고자 하는 품목은 조선 종이(한지), 쌀, 금, 인삼, 초피류 등 이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그들의 의도와 달리 대동강 초입부터 운항이 거절되었다.

  당시에는 문정관(問情官) 제도를 두어 표류나 불법선박에 대해 그 사유를 묻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게 하였는데 관리들은 그들에게 부족한 식량(쌀, 닭, 계란, 채소 등)을 보충해 주면서까지 만류하였으나 기필코 통상을 성사시킬 것임을 고집하며 평양 만경대 부근에 정박하였다. 교역이 점차 어려워지자 셔먼호를 감시하던 조선군 군사를 체포, 억류시키고 억지교섭을 행하던 중 설상가상으로 장마가 끝나고 강물이 빠져나가자 셔먼호는 모래톱에 걸려 운항이 어렵게 되었다. 초조해진 셔먼호는 대포와 소총을 난사하며 식량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러 조선군의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흥분한 군, 민은 화공전법으로 셔먼호를 공격하여 선체를 불태우고 24명 전원을 몰살하였다. 미국은 전년도(1865년)에 남북전쟁이 끝난 상황이라 즉각적 반응을 보이지 못하였으나 이 사건은 5년 후인 1871년 신미양요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눈물의 섬, 한민족 역사의 현장 강화

  3월 4일 초봄이라 하지만 겨울 한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광성보와 용두돈대의 협곡을 빠져나가는 염하(강화해협)의 거센 물줄기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당시의 아픈 신음을 토한다. 강화도는 “눈물의 섬, 역사의 현장”이라고도 표현된다.

  노산 이은상 시인은 광성보에 자리 잡은 강화 전적지 정화 기념비문에 강화의 아픈 역사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강화는 한강 어귀에 있어 사면에 물이 둘리고 섬 안에는 산림이 중첩하여 천연적인 요새지다. 다른 한편 병화를 입어 편안한 날이 없었기에 이 언덕 저 언덕 갯가 풀 한포기 돌 한 덩이에 역사의 사연이 서리고 끼치지 않은 것이 없다. 고조선 이래로 조상들의 한 많은 유적 중에서도 굳이 민족의 피가 어린 전적지를 헤아려 보면 칠백년 풍우가 스쳐간 고려 때 궁궐옛터 고종 19년(서기 1232년) 몽고의 침략으로 수도를 송도로부터 강화로 옮겨 강도라 일컫고 원종 11년(서기 1270년) 환도해 가기까지 무릇 39년 동안 항몽의 근거지가 되었었고 문화의 샘터였기에 우리는 여기를 잊지 못한다. 강화성은 이 곳에 천도했던 고려의 도성이었고 중성을 쌓은 뒤 해안선을 따라 외성을 쌓았으나 인조 14년(서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이 성을 지키지 못해 온갖 치욕을 맛보았었고 다시 그 뒤 고종 3년(서기 1866년)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갑곶진에 상륙을 개시하고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하다 양현수 장군이 지휘하는 정족산성의 전투에서 산포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퇴각했던 것이다. 5년이 지나 고종 8년(서기 1871년)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통상을 표방하고 침입하여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을 차례로 공격해 오자 우리는 최후까지 응전했으나 워낙 무력불급으로 어재연 장군 등 수백 명 용사들이 순국했었다. 4년이 지나 고종 12년(서기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가 초지진 포대를 공격한 뒤 이듬해 병자년에 이른바 강화도 조약을 맺었으며 그로 인하여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것이니 강화도야말로 민족 시련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신미양요의 현장, 강화 광성보 전투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기 제너널 셔먼호의 소각과 승무원들의 비보는 병인양요 때 통역 및 향도를 맡았던 프랑스 신부 리델에 의해 알려졌다.

  천주교 신자인 송운요가 국적 미상의 이양선(異樣船, 서양 선박의 크기와 모양이 다름을 의미)이 대동강에서 소각당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사실은 선사인 매도스 상사, 영국 영사관, 윌리엄스 미국 대리공사에 전달되어 사실 규명과 미, 영, 불 공동대처 방안이 논의되었으나 각 국이 조선의 개항을 선점하려는 욕심에서 어느 하나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 와중에 2년 후인 1868년 5월, 대원군의 친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독일계 미국인 오데르트에 의해 도굴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오데르트가 실력자의 묘를 파서 시체와 부장물을 담보로 통상교섭을 시도하려는 의도였다고 하나 귀족의 무덤에 소장된 귀금속을 훔치려는 단순 도굴단의 도둑 행각에 지나지 않았다.

  대원군의 조선 조정은 洋夷(서양 오랑캐)의 통상 요구를 빙자한 국경 침범과 만행에 곤욕을 치르면서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미국은 공동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단독으로 포함외교(砲艦外交)를 전제한 남북전쟁 이래 최대병력의 원정부대를 구성하였다. 1869년 남북전쟁의 명장 그랜트 장군이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아시아의 무역팽창정책을 강화하였고 조선 개항이 핵심과제가 되어 총 책임자에는 당시 아시아 실정에 해박한 프래드릭 로우 주청 미국 전권공사가 임명되었다. 원정대는 나가사키에서 전개 중인 존 로저스 제독(해군 소장)의 아시아 함대를 파견하였는데 함포 78문을 장착한 군함 5척과 1,230명의 해병대와 해군 수병으로 구성하였다. 그 사이 미국은 청나라를 통해 미국의 의도를 사전 조율하였으나 청의 비협조와 조선의 무대응으로 초기 협상은 수포로 돌아갔다. 1871년 5월 23일 기함 콜로라도를 필두로 원정단이 나가사키를 출발, 30일 작약도에 도착하였다. 조선과 대화가 단절된 상태에서 6월 1일 강화해협의 수로 탐사를 하고있던 중 초지진에서 조선군의 선제공격을 받는다. 조선군이 보유한 대포 등 143문에서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의 화기는 화약의 힘으로 날아가지만 폭발이 되지 않는 포알 대포로 미군 두 명에게 경미한 부상을 주는 정도였다.

  미국의 사과 요구와 대원군의 거절은 미국의 상륙 침공의 빌미가 되어 6월 10일 정오부터 미국의 응징사격이 시작되었다. 압도적 화력에 조선군은 무너지고 미군은 오후 4시경 초지진에 무혈입성, 그 다음날 덕진진까지 점령하였다. 자라목 같이 좁은 해협을 감시하고 있는 최후의 보루인 광성보의 광성돈대, 손돌목 돈대와 용두돈대를 점령하면 김포를 관통해 한양으로 직행할 수 있는 곳으로 물살이 세고 조수 간만의 차가 커 대형 선박은 정박이 어렵고 중소형 선박은 조류에 밀려 좌초 위험이 큰 강화해협 최고의 요새이다.

  11일 11시 모노카시포호에서 함포가 작열하고 수 십대의 보트에 편성한 미 해군, 해병이 상륙, 사거리 1006m의 곡사포를 발사하며 강화진 무중군 어재연 장군 부대와 최후의 백병전까지 벌리게 된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매우 맹렬하게 저항했고 미국은 동아시아에서의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고 기록했다. 어재연 장군이 양손으로 대포알을 던지며 동생 이어순과 함께 결사항전 하였으나 이등병 도허티(J Dougherty)의 총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장군기인 수자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조선군은 전사 243명, 포로 20명, 5개 진지 파괴, 수자기 등 깃발 50점과 수 백점의 병기를 노획당한 채 무릎을 꿇어야 했고 반면 미국은 맥키 해군 중위와 2명의 수병만 전사하였다. 그럼에도 조선 조정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통상 관련 대화를 중지한 채 시간을 끄는 긴 싸움으로 대처했고 장대편지(장대에 편지를 메달아 의사전달)까지 동원했으나 이마저 거절당한 미국은 원정부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7월 3일 아시아 함대를 철수시켰다. 군사적으로는 쾌거였으나 통상외교는 이루지 못한 결과가 되었고 조선에게는 양이를 물리쳤다는 헛된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대원군은 종로 네거리와 경향 각지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즉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란 내용의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을 강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