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프가니스탄 사태 진단 - 박현도


아프가니스탄 사태 진단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1.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프가니스탄은 역사적으로 한국과 그다지 인연이 없는 나라는 아니다.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한국에 전해진 불교는 아프가니스탄 쪽에서 중국으로 들어왔다. 오늘날 불자들이 읽는 『밀린다 왕문경』은 기원전 2세기 후반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고 있던 밀린다(메난드로스 Menandros, Menander) 왕이 인도의 승려 나가세나(Nagasena)와 주고받은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지금도 서점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동양사에서 대하(박트리아), 대월지국으로 알려진 곳이 바로 아프가니스탄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총면적이 6475만 평방킬로미터로 한반도 3배 크기의 나라다. 힌두쿠시 산맥의 5,000~7,000미터에 이르는 산이 나라를 가로지르다보니, 국토의 75퍼센트가 산악지대이고,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곳이 50%에 달하는 아주 험난한 지형이다. 험준한 산악을 품은 아프가니스탄은 바다가 없는 완전 내륙국가다. 파키스탄(2430km), 이란(921km), 투르크메니스탄(804km), 우즈베키스탄(144km), 타지키스탄(1357km), 중국(92km) 등 모두 여섯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1971년 이래 인구조사를 제대로 한 적이 없어서 정확한 수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2020년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총인구수는 38,928,341명이다. 모두 14개의 민족이 사는데, 파슈툰족이 가장 많아 약 42%이고, 그 뒤를 타직(Tajik 27%), 하자라(Hazara 9%), 우즈벡(Uzbek 9%)족 등이 따르고 있다. 언어는 모두 10여 개가 사용되는데, 공식언어는 다리(Dari)와 파슈토(Pashto)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말은 아프간의 땅이라는 뜻이다. 아프간은 6세기경 아바가나(Abagana)에서 나온 말로, 파슈툰족을 가리킨다. 즉, 아프간은 파슈툰족 사람이라는 말이다. 1747년 두라니 파슈툰족(Durrani Pashtun)이 왕국을 이루면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말이 정치공동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19세기에 영국과 세 번에 걸친 전쟁을 치렀다(1차 1839~1942, 2차 1878~1880, 3차 1919~1921).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과 주변 중앙아시아를 두고 ‘그레이트게임(Great Game)’을 벌였다. 1차 전쟁에서 1842년 영국군은 히베르 통로(Khyber Pass)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쪽으로 퇴각하다가 16,000명에 달하는 군인과 군무원이 아프간의 습격에 모두 사망하고, 군의관 1명만 생존하는 참사를 당하였다. 1893년 영국의 외교장관 듀란드는 영국이 지배하는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을 가르는 국경선을 그었다. 이른바 듀란드선(Durand Line)으로, 현재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이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예나 지금이나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제로라인(Zero Line)으로 부른다.

  3차 전쟁에서 영국이 패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1921년에 독립하였고, 1926년 왕위에 오른 아마눌라(Amanullah)는 근대 개혁을 시작하였으나 저항에 부딪쳐 결국 1929년 왕위를 버리고 외국으로 떠나야만 했다. 1933년 왕위에 오른 자히르는 이후 40년간 다스리며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왕정을 1934년에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1953년 왕의 사촌 동생이자 친소련 성향인 모함메드 다우드 칸(Mohammed Daud Khan)이 총리가 되었다. 칸은 사회개혁 정책을 시도하였고, 1956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1973년 칸은 사촌 형이자 왕인 자히르를 군사쿠데타로 쫓아내고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 대통령이 되었다. 칸은 소련에 특별히 더 기울지 않는 비동맹국 정책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다스렸다. 나토와 유연한 관계를 맺는 것을 소련이 반대하자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면서 서구 및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와 우호 관계를 확장할 것이라고 맞섰다. 칸은 사회개혁 정책을 밀어부침과 동시에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였다.

 

2. 소련 침공

 

  1978년 4월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가 발생하여 칸을 살해하였다. 아프가니스탄 공산당은 파르참(Parcham)파와 할끄(Khalq)파 두 세력이 노선을 두고 오랫동안 다툼을 벌였다. 파르참은 점진적인 공산주의 개혁을 주장한 반면, 할끄파는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다. 할끄파는 군부에 스며들었고, 이들의 주도로 1978년 칸을 제거하는 쿠데타가 성공하였다.

  정권을 잡은 할끄파는 파르참파를 제거하였다. 또 할끄파 지도자간 내분이 발생하였다. 1979년 9월 인민민주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장 타라키(Taraki)를 2인자이자 라이벌인 아민(Hafizullah Amin)이 살해하고 권력을 잡았다. 이에 소련은 크게 놀라 소련-아프가니스탄 우호조약 수호를 명분으로 12월 24일 군을 투입하여 아민 정권을 무너뜨리고 파르참파의 지도자 카르말(Babrak Karmal)을 권좌에 앉혔다.

  그런데 소련 침공 6개월 전부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을 도왔다.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Brzezinski)는 1979년 7월 3일 카터 대통령이 반군 지원 명령서에 서명하였다고 밝혔다. 당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비밀리에 벌이고 있는 작전에 맞대응한다고 하였는데, 그 누구도 소련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이는 사실이었다. 소련은 미국이 쳐놓은 덫에 걸린 것이다. 소련군이 국경을 넘던 날, 브레진스키는 카터 대통령에게 “이제 우리가 소련에 베트남 전쟁을 선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We now have the opportunity of giving to the USSR its Vietnam war.)”라고 썼다. 그로부터 무려 10년 동안 브레진스키가 말한 대로 소련은 소련 제국 붕괴를 불러온 전쟁을 한 것이다.

 

3. 괴물의 탄생

 

  돌이켜보면,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이슬람 극단주의의 모태였다. 보기 좋게 ‘소련판 베트남전쟁’으로 한 방 먹이려던 미국은 대소련 항전 전사를 후원했고, 이란의 이슬람혁명 수출을 막으려던 사우디아라비아는 ‘페트로 달러’를 아낌없이 썼으며, 자국 내 파슈툰 민족주의를 막으려던 파키스탄은 갖은 정성으로 무자헤딘을 감싸 안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패퇴한 소련이 무너지면서 냉전이 끝났고, 미국은 자유주의 세계의 승리를 자축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웃으며 손을 털었지만, 누가 알았으랴, 그 자리에서 독버섯이 자라날 줄!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 자르까위(Zarqawi)의 IS, 몰라 오마르(Mullah Omar)의 탈레반이 세상에 고개를 내밀었다.

  탈레반은 학생이라는 아랍어에서 차용한 ‘탈렙(talib)’에 파슈툰어의 복수접미사 ‘안(an)’이 붙어 ‘학생들’이라는 뜻으로,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 종교학교) 학생을 가리킨다. 1893년 영국이 그은 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선 듀란드라인 양쪽은 파슈툰족 거주 지역인데,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파키스탄쪽으로 아프가니스탄 파슈툰족이 난민으로 몰려왔다. 난민 청년들은 페샤와르에서 동쪽으로 약 70㎞ 떨어진 아코라 하탁(Akora Khattak)에 사미울 하끄(Sami’ul Haqq)가 세운 ‘다룰 울룸 하까니아(Darul Uloom Haqqania)’에서 데오반디(Deobandi) 이슬람 사상 교육을 받았다. ‘지하드 대학(University of Jihad)’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룰 울룸 하까니아’는 이슬람 전사를 양성하는 공장 역할을 하였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이슬람을 앞세워 공포정치를 펴며 다스렸던 탈레반이 지난 8월 15일 탈레반이 카불에 무혈 입성하면서 20년 만에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였다. 탈레반은 국제사회를 의식하여 스스로 20년 전과는 다르다고 만천하에 선언하였다. 휴대전화와 인터넷 등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젊은 층이 넘치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예전과 달리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일부 전문가도 탈레반이 달라질 것이라고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은 암울하다. 탈레반은 달라졌다고 외치지만, 국제사회의 우려대로 여학생의 교육 기회는 사라지고 있고, 새로 구성한 정부 요직은 전원 남성에 탈레반 일색이고, 33명 중 무려 14명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지정한 테러리스트다. 내무장관 시라줏딘 하카니(Sirajuddin Haqqani)는 미국 연방수사국이 천만 달러 검거 현상금을 내건 인물이다.

 

4. 미국의 실수

 

  그렇다면 달라진 것 없는 탈레반이 생환한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1979년부터 2001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정보수장을 지낸 투르키 알파이살(Turki al-Faisal) 왕자는 트럼프 미 대통령이 탈레반과 협상을 할 때부터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정통성을 잃었다고 꼬집었다. 제아무리 협상 결과를 알려주었다고 하더라도, 정부를 제쳐두고 미국이 적과 협상을 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말이다. 미국이 아프간 정부와 함께 탈레반과 협상을 하는 것과 미국이 탈레반과 둘이서만 협상을 한 것은 전혀 다른 문제로, 아프간 정부의 정통성에 치명적이었다는 말이다.

  사실 미국의 협상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란의 아프가니스탄 전문가 자파리안(Jafarian)은 정부 지도자들은 탈레반과 막후 협상을 벌여 탈레반에게 고스란히 아프가니스탄을 가져다 바쳤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맞댄 우즈벡인들의 거주지 파르얍(Faryab)주지사로 가니 대통령은 파슈툰족 출신 로그마니(Loghmani)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우즈벡 주민들이 파슈툰족 주지사가 파슈툰이 주축인 텔레반에게 파르얍주를 넘길 것이라고 하면서 결사반대하자 임명안을 철회하였다. 가니 대통령은 로그마니를 파르얍주 대신 가즈니(Ghazni)주지사로 보냈다. 그런데 로그마니는 우즈벡인들의 염려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불과 두 달 만에 가즈니주를 탈레반에게 넘겨주었다. 또, 국가안보보좌관 모헵은 파라(Farah)주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탈레반과 전투를 멈추고 항복하라고 명령하였다. 모헵은 미국에서 자랐고, 배우자는 미국인으로 CIA 직원이다. 모헵이 전화를 걸 당시 파라주에서 정부군은 탈레반에 승리할 가능성이 큰 상태였다.

  불과 서른 시간 내에 탈레반은 남부 거점 칸다하르를 비롯하여 모두 9개 주를 손쉽게 점령하였다. 칸다하르(Kandahar)와 헤라트(Herat)는 육로로 이틀이 걸리는 거리다. 그런데 오전에는 칸다하르, 오후에는 헤라트를 탈레반이 장악하였다. 오토바이와 대전차포, 소련제 칼라시니코프 소총만으로 무장한 탈레반이 혁혁한 전과를 거둔 데에는 정부와 탈레반 사이에 거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미군의 공중 지원 중단 또한 정부군의 패배에 일조하였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에는 비행기와 조종사가 있었지만, 미군 용역회사가 손실이 날 것이 두려워 미군의 아프간 공군 교육을 막는 바람에 아프간 정부군은 공군기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다. 탈레반은 이렇게 아프가니스탄을 피 흘리지 않고 장악하였다.

 

5. 파슈툰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파슈툰족이라는 기득권이 중요한 변수임을 보여준다. 탈레반은 파슈툰족이 주축이다. 물론, 파슈툰족 모두가 탈레반이거나 탈레반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칸다하르(Kandahar)주 스핀볼닥(Spin Boldak)에서 탈레반은 아차크자이 파슈툰족(Achakzai Pashtun) 100여 명을 학살하였다. 2018년에 탈레반에 살해당한 아차크자이 파슈툰족 출신 압둘 라지크(Abdul Raziq) 장군의 묘도 밀어버렸고, 그의 가족이 살던 집은 불탔다. 탈레반에게 뺨을 맞는 동영상이 전 세계에 알려져 보는 이의 분노를 자아낸 아프가니스탄의 코미디언 모함마드(Nazar Mohammad)도 아차크자이 파슈툰족이다. 압둘 라지크 장군 가족과 가까웠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파슈툰족 내에서도 탈레반과 갈등을 빚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아프가니스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그동안 탈레반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잘 이용해온 파키스탄이지만, 듀란드라인은 고민거리다. 그도 그럴 것이 탈레반의 주축인 파슈툰족이 ‘대파슈투니스탄(Greater Pashtunistan)’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듀란드라인을 사이에 두고 파키스탄쪽에는 아프가니스탄보다 더 많은 파슈툰족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탈레반의 기반이다. 탈레반에는 바로 파키스탄쪽에 거주하는 파슈툰족이 가담하고 있다.

  게다가 파키스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별도로 파키스탄 탈레반이 존재한다. 파키스탄 탈레반은 파키스탄 정부의 골칫거리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달리 적극적으로 파키스탄군을 대상으로 한 테러 활동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슈툰족의 이슬람 원리주의와 파슈툰 민족주의가 결합하여 ‘위대한 파슈투니스탄’을 건설하고자 나선다면, 파키스탄에게는 악몽 중의 악몽이 될 것이다. 물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 이를 지지하고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또, 파키스탄보다 인구가 적은 아프가니스탄 파슈툰족은 파슈투니스탄이 생길 경우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6. 혼돈의 아프가니스탄

 

  미국이 없는 아프가니스탄을 두고 주변국이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탈레반을 보는 이란의 종교지도자와 정부의 시각은 상충한다. 종교지도자들은 탈레반을 반대하지만, 정부는 일단 유화책을 쓰고 있고, 정부의 입장을 종교지도자들에게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였다. 921km의 국경선을 맞대고 이미 300만 명이 넘는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이란은 탈레반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지배자 때문에 고초를 겪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웃국가의 정변이 썩 달갑지 않다. 투르크메니스탄(국경선 804km), 우즈베키스탄(144km), 타지키스탄(1357km) 등 러시아 영향권 아래에 국가들 역시 탈레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러시아는 타지키스탄에 군사기지를 운용 중이다. 타지키스탄은 판즈시르(Panjshir) 저항군 보호를 두고 탈레반과 날카롭게 대립 중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돌발사태가 일어나면 러시아 역시 방관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중국은 91km라는 가장 짧은 국경선을 맞대고 있지만 신장 지역과 이어지는 와한회랑(Wakhan Corridor)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민감한 곳이다. 탈레반이 이슬람주의를 앞세워 신장 위구르 무슬림을 지원이라도 하면 중국으로서는 난감하다. 인도 역시 같은 고민이다. 이슬람을 앞세워 카슈미르 문제에 탈레반이 개입하면 대세를 그르칠 가능성이 크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탈레반과 IS의 불꽃 튀는 전쟁도 시작한 모양새다. 사실 양자 관계는 묘연하다. 탈레반이 구성원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IS는 탈레반일 수도 있다. 사실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에서 탈레반으로 활동하는 조직은 IS다. 탈레반이라는 가면을 쓰고 암약하는 IS가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탈레반에 숨어버린 IS는 탈레반으로서도 골치 아픈 존재일 것이다. 1978년 4월 공산주의 쿠데타 때 할끄파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집권을 위해 군조직 내로 파고들어 군권을 쥐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탈레반 속으로 숨어버린 IS가 할끄파처럼 고개를 들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탈레반 내 과격한 하카니가 상대적으로 온건한 두라니 파슈툰족 출신 압둘 가니 바라다르를 제압하듯, 탈레반의 강경노선이 아프가니스탄에 극심한 먹구름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 탈레반 중 어느 파가 안정적으로 권력을 쥘까? 종교는 겉옷이다. 탈레반은 권력이라는 불길에 뛰어든 나방일 뿐이다.

  1880년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시 영국의 로버츠 장군은 이렇게 말하였다. “아프간 사람들은 우리를 보지 않을수록 우리를 덜 싫어한다는 내 말이 옳다.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거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를 침략하려고 한다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로울 것이다. 우리가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쩌면 바이든 대통령은 눈에서 멀어지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로버츠 장군의 말을 되새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진정한 아프가니스탄 열전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