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걸친 두 사람의 갈등: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윤상용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
6.25 전쟁을 놓고 사람들이 가장 먼저 기억하는 인물은 아마도 초대 UN 사령관을 지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원수일 것이다. 한 때 세계를 상대로 싸우며 태평양에서 추축국을 좌절시킨 그는 1945년 이후 일본에 “정복자”로 주둔하면서 “미국인 시이저(American Caesar)”라는 별명을 얻었고,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의 베테랑 군인들이 빠진 냉전 초기의 미군으로 멸망의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원했다. 장비와 전력의 열세로 UN군이 계속 수세에 몰리던 가운데 1950년 9월 15일, 그는 사상 최대규모의 기습상륙작전으로 일컬어지는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하여 한반도 동남쪽 구석까지 몰린 UN군과 국군의 포위를 풀고, 측방이 열린 상태로 보급선이 길어진 북한군의 허를 찌르며 단번에 전세를 뒤집었다. 하지만 이 역전의 상승장군(常勝將軍)은 1951년 4월, 통수권자이던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대통령과 불화 끝에 급작스럽게 보직에서 해임됐다. 아직까지 정확한 해임 정황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과 불명확한 근거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1951년 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더 이상의 확전을 원치 않던 트루먼 대통령의 의중과 달리 맥아더 원수는 북한과 만주로 전면 공세를 원했고,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사령관의 해임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맥아더는 강단이 있고, 비타협적이며, 상대방과 기(氣) 싸움을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대공황 시기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맥아더는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과 군 예산 삭감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다가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다음 번 전쟁에서 적의 대검에 배를 관통당해 쓰러져 적병에게 목을 밟힌 채 진흙 속에서 죽어가는 병사가 마지막으로 내뱉는 저주의 이름이 ‘맥아더’여야지, ‘루즈벨트’가 되지 않기를 빕니다”라고 폭언을 해 사임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중 미 해군의 윌리엄 할시(William F. Halsey, 1882~1959) 제독은 맥아더와 의견차가 발생하게 되면 그는 상대방이 지칠 때까지 논의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술회했다. 6.25 전쟁 중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과도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내내 엄청난 전비를 지출했으므로 트루먼 행정부는 종전과 함께 국방예산을 대규모로 삭감했고, 맥아더 휘하의 미 극동사령부(US Far East Command, FECOM) 병력 또한 1947년까지 30만 명을 헤아리던 것이 불과 한 해 뒤인 1948년엔 142,000명으로 감군했다. 맥아더는 급격한 병력 감축에 지속적으로 항의했지만 트루먼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감군하여 6.25 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6월경 극동사령부에는 10만 8천 명 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다수가 신병들이었다. 이 때문에 극동사령부는 2차대전 중 태평양 전역에서 버려졌던 전쟁물자를 대대적으로 회수하여 썼을 정도였다. 맥아더와 트루먼은 6.25 전쟁 중인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Wake) 섬에서 회견했으나, 그다지 건설적인 이야기는 전혀 오간 것이 없었다. 맥아더는 이 자리에서 중국의 개입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보고했고, 심지어 전쟁을 “올해 안”에 모두 종결 짓겠다는 호언 장담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중국이 본격 개입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트루먼은 전쟁 목표를 “시작한 곳에서 끝나는 것”으로 설정했으나, 맥아더는 근원이 뿌리 뽑힐 때까지 확전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맥아더가 행정부 방침을 거스르는 것을 계속 두고 볼 수 없던 트루먼은 1951년 4월 11일 오전 맥아더 원수를 UN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말았다. 맥아더가 떠난 이후 6.25 전쟁의 결착은 2차 세계대전 중 또 다른 전쟁영웅이자 일곱 명의 원수 중 한 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 대통령이 지었다. 어떻게 보자면 6.25 전쟁의 시작과 마무리가 모두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두 미군 원수의 손을 거쳤던 셈이다.
이 두 사람의 인연은 복잡하면서도 흥미롭다. 두 사람의 첫 인연은 맥아더 장군(당시 소장)이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던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맥아더 총장은 1차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주축이 된 “보너스 군대(Bonus Army)”가 참전수당의 조기지급을 요구하며 워싱턴 D.C. 인근에서 시위를 하자 “지체없이 시위지역을 포위하여 정리하라”는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1874~1964)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 1933년 2월부터 육군참모총장 수석 군사보좌관으로 보직된 아이젠하워 소령은 시위대에 대한 강경진압에 반대했으나, 정작 시위대 진압이 끝난 뒤 스스로 작성해 올린 공식 보고서에는 맥아더의 선택을 합리화함으로써 그를 지원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맥아더가 총장 퇴임 후 1935년 마누엘 퀘존(Manuel Quezon, 1878~1944) 대통령의 요청으로 필리핀 군 고문관으로 초청받자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부 고문관으로 임명했다. 당시 필리핀은 1946년을 목표로 독립을 준비 중이었고, 미 정부는 타이딩스-맥더피(Tydings-McDuffie) 법에 따라 필리핀 독립을 지원 중이었으므로 맥아더에게 미래 필리핀 군을 설계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두 사람은 1935년 10월 26일자로 필리핀에 도착했으며, 곧 ‘독립국가‘ 필리핀의 국방계획을 수립에 착수했으나 이 때까지 순탄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필리핀 군의 미래에 대한 두 사람의 구상이 달랐고, 또 리더십의 스타일도 크게 달랐다. 1936년 8월, 퀘존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필리핀 군 원수 계급을 부여하겠다고 했을 때도 아이젠하워는 이를 거절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맥아더를 설득하려 했으나 맥아더는 이를 수락했고, 이것이 사실 처음부터 맥아더의 계획이었지 퀘존의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기본적으로 아이젠하워는 필요할 때 직언을 하는 타입이었지만, 맥아더는 자신의 판단력과 리더십에 자신이 있었으므로 참모진에 예스맨을 선호했다. 훗날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와 함께한 2년을 그다지 좋게 기억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내내 개인적인 야망, 영광, 이기주의로 야기된 모든 문제들로 충돌했다”고 술회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38년, 맥아더가 필리핀 국민들에게 군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할 요량으로 대규모 퍼레이드를 조직한 사건으로 인해 파국을 맞았다. 퀘존 대통령이 자신과 상의 없이 퍼레이드를 조직한 것에 대해 크게 항의하자 맥아더는 자신이 내린 지시에 따라 열정적으로 퍼레이드 준비를 했을 뿐인 아이젠하워에게 책임을 돌렸다. 맥아더는 참모들을 전부 불러 놓은 앞에서 ‘실제 퍼레이드를 준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해도 좋을지의 여부만 조용히 알아보라고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에 폭발해버렸다. “장군님, 지금 결국 제가 거짓말쟁이라고 하고 계십니다만, 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전 그만 본토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에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따로 불러 “자네의 네덜란드계 조상의 성질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흥미롭구만. 다 오해에서 야기된 일 같으니 이 정도로 잊어버리세.”라고 다독였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고, 아이젠하워는 리처드 서덜랜드(Richard K. Sutherland, 1893~1966) 소령(중장 예편)과 교대한 후 본토로 돌아가버렸다.
이후 두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갈라져 갔다. 본토로 돌아간 아이젠하워는 월터 크루거(Walter Krueger, 1881~1967) 장군 휘하에서 미 제 3군 참모장을 지냈으며, 1941년 3월에 대령으로 진급한 뒤 육군부 전쟁기획국(개전 후 작전처로 개명) 국장에 보직됐고,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 1880~1959) 육군참모총장의 눈에 띄면서 승승장구했다. 미군이 2차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아이젠하워는 유럽, 맥아더는 아시아권에서 활약했으므로 두 사람은 1939년 이후 단 한 번도 마주칠 일이 없었다. 종전 후 일본에 진주하여 군정사령관이 된 맥아더와 마셜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된 아이젠하워는 도쿄에서 단 한차례 만났으나 그걸로 끝이었고, 다시 아이젠하워는 연합 원정군 최고사령부(SHAEF: Supreme Headquarters Allied Expeditionary Force) 사령관이 되어 프랑스로 떠났고, 곧이어 6.25 전쟁이 터졌을 땐 맥아더가 UN 사령관이 되어 신생 대한민국의 방어와 UN군의 역습을 지휘했다. 그러던 중 1951년 4월 12일에 맥아더가 UN 사령관에서 해임되자 AP(Associated Press)의 딕 오말리(Dick O’Malley, ~1999) 기자는 독일 코블렌츠(Coblenz)에서 프랑스 장성들과 회담 후 나오던 아이젠하워에게 맥아더 해임소식을 들었는지 물었는데, 이 소식을 전혀 모르던 아이젠하워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도 못했는데(I’ll be darned)”라 답했다.
불과 1년 뒤인 1952년, 아이젠하워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당선 후 한국에 직접 방문하여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걸었다. 그는 실제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공약 이행을 위해 한국에 방문했으며, 중국측이 휴전에 동의하도록 강요할 목적으로 핵무기 사용도 불사할 용의가 있음을 강조했다. 중국은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을 지휘한 아이젠하워의 명성에 주눅들었고, 무엇보다 전쟁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차에 1953년 소련의 스탈린(Joseph V. Stalin, 1878~1953)서기장마저 죽었으므로 휴전이 전격적으로 성사됐다. 휴전이 성사되자마자 아이젠하워는 글로리 작전(Operation Glory)과 빅 스위치 작전(Operation Big Switch)을 실시하여 전사자 유해와 포로를 공산진영과 교환하면서 전쟁을 마무리 짓겠다는 공약을 완수했다.
사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악연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으므로 당대에도 두 사람 사이가 좋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고, 실제로도 두 사람은 필리핀 근무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다. 부처 같은 인품의 아이젠하워조차도 필리핀을 떠나던 당시 맥아더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담은 언급을 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는 훗날 맥아더 휘하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언급하면서 이 기간을 통해 “전쟁 때 부여받은 막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인 1967년경, 맥아더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변했다. “우리 두 사람의 ‘적대관계’는 사실 과장된 측면이 많다. … 두 사내가 7년씩이나 함께 일했다면 강한 유대감이 있어서 그랬던 것 아니겠는가?”
1960년 1월 26일, 맥아더의 80회 생일날 노년의 아이젠하워는 ‘함께 늙은’ 그의 옛 상관에게 생일 축전을 보냈다. “우리 조국을 위해 헌신해 온 장군님의 노고에 대한 우리 모두의 감사한 마음이 오늘 새삼 새로워지는 느낌입니다.” 그 얼마 뒤 뉴욕시내 왈도프 아스토리아(Waldof Astoria) 호텔에 거주하던 맥아더는 워싱턴 D.C.에 거주 중이던 아이젠하워를 일부러 찾아가 두 사람은 인생 마지막으로 해후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부러 찾아간 정황으로 볼 때 둘은 마지막으로 만나 그간의 모든 앙금을 털어내지 않았을까 추측될 뿐이다. 맥아더는 4년 뒤인 1964년 4월 5일에 타계했고, 아이젠하워는 그로부터 다시 5년 뒤인 1969년 3월 28일에 눈을 감았다.
성격과 리더십 스타일이 크게 다른 두 사람은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소 독단적이지만 항상 자신감에 차 있고 훌륭한 쇼맨십을 갖춘 맥아더의 스타일은 조용하면서 포용적이며 상대방과 타협을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스타일인 아이젠하워와 큰 차이가 있었다.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관계였는지는 이들 둘 밖에 모를 일이다. 하지만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두 번 이상은 경험하듯 한 번 틀어진 관계는 회복하기가 무척 어렵고, 그 후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것 역시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마지막 순간 화해가 가능했던 것은 서로의 진심과 사심 없는 마음 가짐을 내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생에 걸친 두 사람의 갈등: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윤상용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
6.25 전쟁을 놓고 사람들이 가장 먼저 기억하는 인물은 아마도 초대 UN 사령관을 지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원수일 것이다. 한 때 세계를 상대로 싸우며 태평양에서 추축국을 좌절시킨 그는 1945년 이후 일본에 “정복자”로 주둔하면서 “미국인 시이저(American Caesar)”라는 별명을 얻었고,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의 베테랑 군인들이 빠진 냉전 초기의 미군으로 멸망의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원했다. 장비와 전력의 열세로 UN군이 계속 수세에 몰리던 가운데 1950년 9월 15일, 그는 사상 최대규모의 기습상륙작전으로 일컬어지는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하여 한반도 동남쪽 구석까지 몰린 UN군과 국군의 포위를 풀고, 측방이 열린 상태로 보급선이 길어진 북한군의 허를 찌르며 단번에 전세를 뒤집었다. 하지만 이 역전의 상승장군(常勝將軍)은 1951년 4월, 통수권자이던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대통령과 불화 끝에 급작스럽게 보직에서 해임됐다. 아직까지 정확한 해임 정황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과 불명확한 근거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1951년 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더 이상의 확전을 원치 않던 트루먼 대통령의 의중과 달리 맥아더 원수는 북한과 만주로 전면 공세를 원했고,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사령관의 해임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맥아더는 강단이 있고, 비타협적이며, 상대방과 기(氣) 싸움을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대공황 시기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맥아더는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과 군 예산 삭감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다가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다음 번 전쟁에서 적의 대검에 배를 관통당해 쓰러져 적병에게 목을 밟힌 채 진흙 속에서 죽어가는 병사가 마지막으로 내뱉는 저주의 이름이 ‘맥아더’여야지, ‘루즈벨트’가 되지 않기를 빕니다”라고 폭언을 해 사임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중 미 해군의 윌리엄 할시(William F. Halsey, 1882~1959) 제독은 맥아더와 의견차가 발생하게 되면 그는 상대방이 지칠 때까지 논의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술회했다. 6.25 전쟁 중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과도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내내 엄청난 전비를 지출했으므로 트루먼 행정부는 종전과 함께 국방예산을 대규모로 삭감했고, 맥아더 휘하의 미 극동사령부(US Far East Command, FECOM) 병력 또한 1947년까지 30만 명을 헤아리던 것이 불과 한 해 뒤인 1948년엔 142,000명으로 감군했다. 맥아더는 급격한 병력 감축에 지속적으로 항의했지만 트루먼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감군하여 6.25 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6월경 극동사령부에는 10만 8천 명 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다수가 신병들이었다. 이 때문에 극동사령부는 2차대전 중 태평양 전역에서 버려졌던 전쟁물자를 대대적으로 회수하여 썼을 정도였다. 맥아더와 트루먼은 6.25 전쟁 중인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Wake) 섬에서 회견했으나, 그다지 건설적인 이야기는 전혀 오간 것이 없었다. 맥아더는 이 자리에서 중국의 개입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보고했고, 심지어 전쟁을 “올해 안”에 모두 종결 짓겠다는 호언 장담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중국이 본격 개입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트루먼은 전쟁 목표를 “시작한 곳에서 끝나는 것”으로 설정했으나, 맥아더는 근원이 뿌리 뽑힐 때까지 확전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맥아더가 행정부 방침을 거스르는 것을 계속 두고 볼 수 없던 트루먼은 1951년 4월 11일 오전 맥아더 원수를 UN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말았다. 맥아더가 떠난 이후 6.25 전쟁의 결착은 2차 세계대전 중 또 다른 전쟁영웅이자 일곱 명의 원수 중 한 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 대통령이 지었다. 어떻게 보자면 6.25 전쟁의 시작과 마무리가 모두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두 미군 원수의 손을 거쳤던 셈이다.
이 두 사람의 인연은 복잡하면서도 흥미롭다. 두 사람의 첫 인연은 맥아더 장군(당시 소장)이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던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맥아더 총장은 1차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주축이 된 “보너스 군대(Bonus Army)”가 참전수당의 조기지급을 요구하며 워싱턴 D.C. 인근에서 시위를 하자 “지체없이 시위지역을 포위하여 정리하라”는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1874~1964)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 1933년 2월부터 육군참모총장 수석 군사보좌관으로 보직된 아이젠하워 소령은 시위대에 대한 강경진압에 반대했으나, 정작 시위대 진압이 끝난 뒤 스스로 작성해 올린 공식 보고서에는 맥아더의 선택을 합리화함으로써 그를 지원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맥아더가 총장 퇴임 후 1935년 마누엘 퀘존(Manuel Quezon, 1878~1944) 대통령의 요청으로 필리핀 군 고문관으로 초청받자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부 고문관으로 임명했다. 당시 필리핀은 1946년을 목표로 독립을 준비 중이었고, 미 정부는 타이딩스-맥더피(Tydings-McDuffie) 법에 따라 필리핀 독립을 지원 중이었으므로 맥아더에게 미래 필리핀 군을 설계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두 사람은 1935년 10월 26일자로 필리핀에 도착했으며, 곧 ‘독립국가‘ 필리핀의 국방계획을 수립에 착수했으나 이 때까지 순탄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필리핀 군의 미래에 대한 두 사람의 구상이 달랐고, 또 리더십의 스타일도 크게 달랐다. 1936년 8월, 퀘존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필리핀 군 원수 계급을 부여하겠다고 했을 때도 아이젠하워는 이를 거절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맥아더를 설득하려 했으나 맥아더는 이를 수락했고, 이것이 사실 처음부터 맥아더의 계획이었지 퀘존의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기본적으로 아이젠하워는 필요할 때 직언을 하는 타입이었지만, 맥아더는 자신의 판단력과 리더십에 자신이 있었으므로 참모진에 예스맨을 선호했다. 훗날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와 함께한 2년을 그다지 좋게 기억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내내 개인적인 야망, 영광, 이기주의로 야기된 모든 문제들로 충돌했다”고 술회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38년, 맥아더가 필리핀 국민들에게 군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할 요량으로 대규모 퍼레이드를 조직한 사건으로 인해 파국을 맞았다. 퀘존 대통령이 자신과 상의 없이 퍼레이드를 조직한 것에 대해 크게 항의하자 맥아더는 자신이 내린 지시에 따라 열정적으로 퍼레이드 준비를 했을 뿐인 아이젠하워에게 책임을 돌렸다. 맥아더는 참모들을 전부 불러 놓은 앞에서 ‘실제 퍼레이드를 준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해도 좋을지의 여부만 조용히 알아보라고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에 폭발해버렸다. “장군님, 지금 결국 제가 거짓말쟁이라고 하고 계십니다만, 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전 그만 본토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에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따로 불러 “자네의 네덜란드계 조상의 성질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흥미롭구만. 다 오해에서 야기된 일 같으니 이 정도로 잊어버리세.”라고 다독였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고, 아이젠하워는 리처드 서덜랜드(Richard K. Sutherland, 1893~1966) 소령(중장 예편)과 교대한 후 본토로 돌아가버렸다.
이후 두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갈라져 갔다. 본토로 돌아간 아이젠하워는 월터 크루거(Walter Krueger, 1881~1967) 장군 휘하에서 미 제 3군 참모장을 지냈으며, 1941년 3월에 대령으로 진급한 뒤 육군부 전쟁기획국(개전 후 작전처로 개명) 국장에 보직됐고,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 1880~1959) 육군참모총장의 눈에 띄면서 승승장구했다. 미군이 2차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아이젠하워는 유럽, 맥아더는 아시아권에서 활약했으므로 두 사람은 1939년 이후 단 한 번도 마주칠 일이 없었다. 종전 후 일본에 진주하여 군정사령관이 된 맥아더와 마셜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된 아이젠하워는 도쿄에서 단 한차례 만났으나 그걸로 끝이었고, 다시 아이젠하워는 연합 원정군 최고사령부(SHAEF: Supreme Headquarters Allied Expeditionary Force) 사령관이 되어 프랑스로 떠났고, 곧이어 6.25 전쟁이 터졌을 땐 맥아더가 UN 사령관이 되어 신생 대한민국의 방어와 UN군의 역습을 지휘했다. 그러던 중 1951년 4월 12일에 맥아더가 UN 사령관에서 해임되자 AP(Associated Press)의 딕 오말리(Dick O’Malley, ~1999) 기자는 독일 코블렌츠(Coblenz)에서 프랑스 장성들과 회담 후 나오던 아이젠하워에게 맥아더 해임소식을 들었는지 물었는데, 이 소식을 전혀 모르던 아이젠하워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도 못했는데(I’ll be darned)”라 답했다.
불과 1년 뒤인 1952년, 아이젠하워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당선 후 한국에 직접 방문하여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걸었다. 그는 실제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공약 이행을 위해 한국에 방문했으며, 중국측이 휴전에 동의하도록 강요할 목적으로 핵무기 사용도 불사할 용의가 있음을 강조했다. 중국은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을 지휘한 아이젠하워의 명성에 주눅들었고, 무엇보다 전쟁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차에 1953년 소련의 스탈린(Joseph V. Stalin, 1878~1953)서기장마저 죽었으므로 휴전이 전격적으로 성사됐다. 휴전이 성사되자마자 아이젠하워는 글로리 작전(Operation Glory)과 빅 스위치 작전(Operation Big Switch)을 실시하여 전사자 유해와 포로를 공산진영과 교환하면서 전쟁을 마무리 짓겠다는 공약을 완수했다.
사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악연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으므로 당대에도 두 사람 사이가 좋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고, 실제로도 두 사람은 필리핀 근무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다. 부처 같은 인품의 아이젠하워조차도 필리핀을 떠나던 당시 맥아더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담은 언급을 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는 훗날 맥아더 휘하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언급하면서 이 기간을 통해 “전쟁 때 부여받은 막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인 1967년경, 맥아더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변했다. “우리 두 사람의 ‘적대관계’는 사실 과장된 측면이 많다. … 두 사내가 7년씩이나 함께 일했다면 강한 유대감이 있어서 그랬던 것 아니겠는가?”
1960년 1월 26일, 맥아더의 80회 생일날 노년의 아이젠하워는 ‘함께 늙은’ 그의 옛 상관에게 생일 축전을 보냈다. “우리 조국을 위해 헌신해 온 장군님의 노고에 대한 우리 모두의 감사한 마음이 오늘 새삼 새로워지는 느낌입니다.” 그 얼마 뒤 뉴욕시내 왈도프 아스토리아(Waldof Astoria) 호텔에 거주하던 맥아더는 워싱턴 D.C.에 거주 중이던 아이젠하워를 일부러 찾아가 두 사람은 인생 마지막으로 해후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부러 찾아간 정황으로 볼 때 둘은 마지막으로 만나 그간의 모든 앙금을 털어내지 않았을까 추측될 뿐이다. 맥아더는 4년 뒤인 1964년 4월 5일에 타계했고, 아이젠하워는 그로부터 다시 5년 뒤인 1969년 3월 28일에 눈을 감았다.
성격과 리더십 스타일이 크게 다른 두 사람은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소 독단적이지만 항상 자신감에 차 있고 훌륭한 쇼맨십을 갖춘 맥아더의 스타일은 조용하면서 포용적이며 상대방과 타협을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스타일인 아이젠하워와 큰 차이가 있었다.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관계였는지는 이들 둘 밖에 모를 일이다. 하지만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두 번 이상은 경험하듯 한 번 틀어진 관계는 회복하기가 무척 어렵고, 그 후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것 역시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마지막 순간 화해가 가능했던 것은 서로의 진심과 사심 없는 마음 가짐을 내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